설교

최고의 부활 노래 - 요한복음 20:11~18[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4-21 15:10
조회
25011
2019년 4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최고의 부활 노래
본문: 요한복음 20:11~18



부활의 아침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죽임을 넘어 부활하신 사건을 한결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하는 말씀을 보면,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동일하게 전하는 진실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각기 신학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전하는 진실이 있습니다.

네 복음서 공통적으로 일치되는 증언은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인들이요, 그 가운데서도 마리아가 그 첫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증언 역시 그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말씀은 전적으로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전하는 데 할애되어 있습니다. 어떤 복음서보다도 더 생생하고 상세하게 그 만남의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바로 앞의 증언을 볼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에는 막달라 사람 마리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동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빈 무덤을 발견했을 때 두 제자는 믿기지 않아 자리를 떴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자리를 지킨 채 무덤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고, 마침내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요, 첫 증언자가 됩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어째서 부활의 첫 증인이 제자들이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였을까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삶과 그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반해 여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아마도 그 마음은 결코 제자들에 뒤지지 않았겠지만 당시 여러 가지 제약으로 예수님의 일행과 관련한 역할에서 표면에 드러나게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조건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기록자의 눈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복음서는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언자로 여인들을 꼽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편견으로 배제된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적인 사건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그들의 역할을 말해줍니다. 두말할 것 없이 여인들은 사회적으로 배제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게서는 그렇게 대접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그 여인들은 그저 시중을 드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말씀을 배우고 따를 만한 자격을 지닌 이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남성 제자들과 똑같은 반열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열두 제자의 반열에 들지 못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교회에서마저 그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부활을 전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해줍니다.
이 진실은 부활의 사건이, 현실에 존재하는 삶의 질서 안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침묵과 죽음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그 침묵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삶을 삶답게 누리는 사건이 바로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삶을 가장 절박하게 희망했던 이들이 부활의 첫 목격자이자 증언자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의 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말씀은 다른 복음서들이 증언한 것과 다소 다른 특이한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는 장면을 훨씬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구별됩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마리아 역시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설마 살아나신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기에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신 앞에 나타난 사람을 그저 동산지기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마리아야!” 하고 부르는 대목에서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친숙한 음성을 듣는 순간 알아차립니다. 자신의 존재를 알도록 일깨워준 그 부름을 환기하는 순간 자신 앞에 선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곧바로 “선생님!” 하고 외칩니다.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께 다가가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곧바로 전하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말하여라.” 그 말을 듣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자기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전하였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특이한 점입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곤란한 말씀 가운데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부활의 비밀, 부활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장차 승천하게 될 것을 예고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고(24:51) 같은 저자의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는(1:9) 그 사실을 연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이 말씀을 연결하면 명백히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아직 그러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허락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승천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과는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에게 당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요한 20:2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만나고 도마를 만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그 중간에는 의미심장한 기사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을 만났을 때의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1~23)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를 것을 권하는 장면입니다. 그 다음에야 당신의 몸을 만질 것을 허락하였고, 도마가 비로소 예수님의 몸을 만집니다.
이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신 이야기는 성령의 체험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특별한 성령의 체험이 필요했겠느냐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이미 성령께서 예수님께 임재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삼위일체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삼위일체론이 정립되기 이전의 이야기이며, 성서가 특별히 성령을 말할 때 강조하고 있는 어떤 진실이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나 주어진 현재의 조건을 넘어 초월하게 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며 그 역사의 결과는 언제나 평화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직 당신의 몸을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은, 부활 이전의 예수님의 몸과 부활 이후 예수님의 몸이 다르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 질적 차이를 아는 이라야 비로소 부활한 당신의 몸의 실체를 만지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친숙한 옛 관계들과 조건들에로의 복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삶의 개시이며 관철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걸 아느냐, 그러면 만져라. 그 진실을 모른다면 내 몸을 만져도 부활한 몸을 만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 성서의 번역자들과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한결같이 도마를 의심많은 제자로 그리고 있지만, 거꾸로 도마는 그 부활의 의미를 가장 확실하게 깨달은 제자일 수 있습니다.)

이 진실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사도들은 애를 먹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데도 애를 먹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설파하는 데도 애를 먹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곳곳에서 부활에 관해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부활의 진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진땀을 흘리며 부활에 관해 설파하는 대목을 볼까요?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옵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고, 그 하나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모든 살이 똑같은 살은 아닙니다. 사람의 살도 있고, 짐승의 살도 있고, 새의 살도 있고, 물고기의 살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저마다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광이 다릅니다. 별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고전 15:35~44)
이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면 부활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저 역사적 사건이라든지 정신적 차원의 사건이라 하면 오히려 이해될 수 있는데, 성경 말씀은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일관되게 몸의 부활을 강조하고, 그걸 또한 만져볼 수 있다고 하지 않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신약성서,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는 영지주의와 끊임없이 분투하였습니다. 육체적 물질적 삶을 부정하고 영적 차원의 구원만을 역설한 사상입니다. 이에 대해 분투하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몸을 강조하고 만져볼 수 있다고 한 것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부활사건이 무슨 허깨비 같은 환상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삶이 성화되고 영화되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으되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이 시간 어쩌면 사도들보다 더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말하면 부활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말을 하면서도 두렵습니다. 저는 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지금부터 한 노래 가사를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 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 거기 없고, 이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오

우리가 다 아는 “내 영혼 바람되어”(“천개의 바람”) 가사입니다. 이 시대 최고의 부활 노래입니다. 물론 이 노래가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과 결부될 때 최고의 부활 노래가 됩니다. 그 기억과 더불어 이 노래의 진실을 믿고 있고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부활의 의미를 믿는 것이요 그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또 어떤 설명을 덧붙일 수도 있습니다. 하찮고 사소한 것들로 울고 웃던 일상을 순식간에 앗아버리고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면, 새로운 세상은 그 하찮고 사소한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는 세상일 것입니다. 바람으로, 별빛으로, 햇빛으로, 가을비로, 나는 새로, 또 그 어떤 것으로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모두가 누리는, 그 정의로운 삶, 평화로운 삶, 그것이 곧 부활의 의미입니다.
내가 만져볼 수 있는 정의로운 삶, 내가 만져볼 수 있는 평화로운 삶, 그것이 부활의 몸입니다. 그에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 진정한 삶, 부활의 삶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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