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 - 이사야 55:1~5[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6-30 13:46
조회
37145
2019년 6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
본문: 이사야 55:1~5



오늘 우리는 구약 예언의 시대 진정한 신학적 거인 가운데 한 사람인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 가운데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 번째 이사야의 선포 마지막 대목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두 번째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바빌론 포로로 붙잡혀 가 있던 시기 막바지에 희망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포로로 붙잡혀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진정한 구원의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탁월한 역사적 식견을 가진 예언자 이사야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었듯이 다시 바빌론에서 해방되리라 선포했고, 그 구원의 희망을 ‘제2의 출애굽’으로 힘주어 선포하였습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그와 같이 제2의 출애굽으로 누리게 될 풍요로운 삶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출애굽의 목표가 젖과 꿀이 넘치는 가나안 복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2의 출애굽 또한 그렇게 젖과 꿀이 넘치는 풍요로운 삶이었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마다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그 열망을 본문말씀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풍요로운 삶이 과연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어떻게 그 삶을 누릴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본문말씀은 그 첫머리에서 마치 시장에서 상인이 손님들을 부르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누구나, 그야말로 돈이 없는 사람이라도 와서 돈을 지불할 필요도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외칩니다. 누구나 거저 포도주와 젖을 구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풍요로운 삶에 대한 갈망에 호응하는 시원한 목소리입니다. 사실 어떤 설명이 덧붙여져야 이해할 수 있는 선포가 아닙니다. 누구나 갈망하는 삶에 대한 기대를 평범하게 경험하는 삶의 현실의 차원에서 분명하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필요한 모든 것들이 쌓여 있어도 돈이 없으면 내 손에 쥘 수 없는데, 돈 없이도 다 구할 수 있다니 얼마나 반가운 소리입니까?

그런데 그 반가운 목소리는,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선포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 선포는 지금 사람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유념하되, 그 현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삶의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이 선포는 지금 사람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땀을 흘려도 땀의 결과를 정당하게 누리지 못하는 현실, 뭔가 손에 쥐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바라는 갈망을 이뤄주지는 못하는 현실을 말합니다.
오늘 누구나 정말 열심히 일해 보람찬 삶을 꾸리고자 하지만, 일할 기회마저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일할 기회를 누린다 해도 만족스러운 소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럭저럭 먹고 산다 해도 그나마 삶을 누리기까지 내 영혼을 누군가에게 저당 잡히고 있다는 의식에 사로잡힌 경우 또한 하다합니다.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고,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 때문에 수고하는 것은 바로 그 현실을 말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선포합니다.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와서 들어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운 삶을 누리게 되리라는 선포합니다. 말씀을 따르면 영혼이 온전히 자유를 구가하며 살게 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백성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뭘까요? 본문 자체로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예언자의 선포 전반적인 맥락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 곧 백성들 가운데서 이뤄져야 할 정의입니다. 그 정의가 이뤄지면,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는 일,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 것을 위해 수고하는 일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모든 백성이 진정으로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것은 필요한 양식을 누리는 데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을 말하는 동시에 영혼의 자유로움을 맘껏 구가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선포는 그 길에 이르는 과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꼬집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겠으니, 이것은 곧 다윗에게 베푼 나의 확실한 은혜다. 내가 그를 많은 민족 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많은 민족들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다.’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너에게 달려올 것이니, 이는 주 너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서 말씀을 때할 때, 그 본문말씀이 반영하고 있는 미묘한 긴장을 쉽사리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 대목 역시 그러한 경우입니다. 이 본문말씀 안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이 하나님의 약속은 과거 다윗 왕과 맺었던 약속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이제는 그 때 다윗 왕과 맺었던 약속과 같은 약속을 백성과 직접 맺겠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맺은 약속은, 주의 말씀을 따르면 그 왕조가 영원히 번영을 누리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삼하 7:8~16).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약속이 파기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89편 38~39절은 그 진실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왕에게 노하셨습니다. 물리치고 내버리셨습니다. 주의 종과 맺으신 언약을 폐기하시고, 그의 왕관을 욕되게 해서 땅에 내던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 조건에서 약속이 어떤 운명에 처해지는지 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사람들은 그 약속을 그대로 믿고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사야는 그 옛 약속이 갱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두 번째 이사야 선포 가운데 등장하는 고난받는 종으로서 메시아에 관한 선포는, 예언자 이사야가 흔히 사람들이 가졌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기대를 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에는 그 두 가지 기대가 아무런 모순 없는 듯 통합되어 있지만,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아로 믿는 것과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는 믿음은 고난을 겪는 이가 그 고난의 질고를 이겨낸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반면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은 그 고난에 상관없이 문제해결사로서 메시아를 기대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선포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기대를 봅니다. 이사야는 민족주의적 신앙으로부터 보편주의적 신앙으로의 전환, 약속에 대한 맹목적 신앙으로부터 약속에 대한 책임적 신앙으로의 전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약속의 갱신을 확정적으로 선포합니다. 다윗 왕과 맺은 약속에서 백성과 새롭게 맺는 약속으로의 전환입니다.
그 약속을 나타내는 방식도 바뀝니다. 다윗 왕에게는 “내가 그를 많은 민족 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많은 민족들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약속의 당사자가 된 백성들에게는,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너에게 달려 올 것이니, 이는 주 너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많은 민족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다는 것은, 힘을 가진 권위에 복종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방민족에 대한 다윗 왕의 승리와 정복이 곧 그 징표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에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르고 그들이 달려온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권위에 동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힘으로 이끌지 않아도 따라 오게 만드는 권위, 기꺼운 마음으로 동의하게 만드는 권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승리와 정복이 아닌 감화력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힘이 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하는 대상에 대한 태도와 감화력을 지니고 있기에 절로 따르게 되는 대상에 대한 태도가 같지 않습니다.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를 따르는 것과 사람이 살기 좋은 나라이기에 선망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는 백성의 영광, 그것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사야는 일관되게 제2의 출애굽을 선포했습니다. 첫 번째 출애굽과 두 번째 출애굽의 목표는 동일합니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풍요로운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더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풍요로운 삶은 무엇을 뜻할까요? 출애굽한 백성들이 목표로 삼은 ‘젖과 꿀이 넘치는 가나안 복지’를 말합니다. 그것이 순전히 물질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물질적 생산량의 총량을 뜻하는 것일까요? GDP를 기준으로 하는 경제규모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일강 유역의 풍요로운 이집트 땅과 빈약한 요단강을 중심으로 하는 가나안 땅을 비교하자면 어불성설입니다.
그 의미는, 힘 있는 인간의 업적이 강조되는 삶의 현실과 누구라도 마땅히 자기 삶을 누릴 수 있는 현실의 대비를 통해서만 분명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리고도 땀의 결과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과 땀을 흘리고 그 땀의 결과를 누구나 누리는 삶의 현실의 대비를 통해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넘치는 땅이라는 것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들이 누리는 그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다윗 왕에 대한 약속의 갱신을 선포하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다시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출애굽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갈망했던 기대보다 더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상황은 이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면 모든 것이 다 되리라는 기대의 상황이었지만, 제2의 출애굽의 상황은 자기민족의 왕조가 형성되었어도 이루지 못했던 기대와 꿈, 그것을 다시 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진실은 오히려 오늘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놀라운 경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는 삶의 현실은 더욱 각박하지 않습니까? 경제규모 10위권,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체감하는 삶의 현실은 여전히 각박합니다. 불안정한 일자리로 늘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열심히 일하면서도 충분한 생계비를 누리지 못해 허덕이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남북간 평화를 위한 시도로 안보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며, 여러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을 포용함으로써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어떤 도덕적 위기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며, 경제정책의 가시적 성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북간 평화를 이루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진정한 포용국가를 이루기 위한 실질적 조치들을 취하지 못하고 뒷걸음치는 사태,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만큼 땀의 결실을 누리지 못하는 사태를, 우리는 염려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죽거나, 짤리거나, 속거나” 하는 사태를 우리는 염려해야 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정의의 부재로 삶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태, 그래서 진정으로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는 사태를 염려해야 합니다.
교회가 여전히 물질적 축복만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번영의 신학에 매여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그 사태에 대해 교회가 그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자체가 염려의 대상이 되고,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도들이 염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은 그저 물질적 축복만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물질적 삶 안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정의가 깃들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따름으로써, 곧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이룸으로써,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고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 것을 위해 수고하는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나, 좋은 것을 먹고 영혼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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