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늘의 삶을 누리는 사람들 - 누가복음 10:17~20[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9-29 18:43
조회
58630
2019년 9월 29(일) 오전 11시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늘의 삶을 누리는 사람들
본문: 누가복음 10:17~20



오늘 본문말씀은 흥미로운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일흔 두(사본에 따라 ‘일흔’) 사람을 세워 각 고을로 보내신 후에 그들이 되돌아와 보고하는 장면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라는 관념에 비추어 보면 일흔 두 사람은 그 ‘제자’들과는 다른 사람이겠지만,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틀림없는 제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각 고을로 보내시면서 평화를 전하고 병자들을 치료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일흔 두 사람은 그 사명을 전하고 기쁨에 가득 차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보고를 합니다. ‘선교보고대회’를 연 셈입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귀신에 사로잡혀 그에 복종하는 줄 알았는데, 이 제자들이 평화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을 때 귀신들마저 그 제자들에게 복종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생각했던 현실의 힘을 떨쳐버리고, 무엇이 진정으로 평화를 얻는 길인지 깨우치고 따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교우께서 저에게 “귀신을 믿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귀신의 존재를 믿느냐는 이야기이겠지요? 그 귀신이 도대체 뭘까요?
성서에서는 그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사탄이라 말하는데, 그 사탄은 무엇을 말할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사탄은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의 힘을 말합니다.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힘입니다. 구약성서의 관념에 따르면, 그것은 맘몬일 수도 있고, 몰록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면, 사람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자본의 위력일 수도 있고, 끊임없이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그야말로 악마적인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죽음의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사탄입니다. 사람이 그 힘에 굴복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끝내는 자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탄은 흉악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그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옵니다. 바울은 사탄이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고후 11:14). 따라서 불가항력적으로 보이는 삶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는 그로부터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귀신들이 힘을 잃고 복종하는 놀라운 일을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사람들이 어쩔 도리 없이 매인 힘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어떤 사례들을 말할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께서 거라사의 광인을 치유해준 사건(마가 5:1 이하)을 보면, 그 귀신의 실체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귀신의 실체는 ‘군대’(레기온: 로마군의 한 사단으로 약 6,000명) 아니었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한 사람의 정신을, 그 사람의 영혼을 앗아간 귀신의 실체는 로마의 군사적 폭력과 지배였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지배하는 귀신들이 예수의 제자들 앞에 굴복하였다니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이었겠습니까? 그렇게 기뻐하는 일흔 두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이 흥에 겨워 평화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탄은 흔히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에베 2:2). 그것은 세상을 굽어보며 그 세상을 자신의 손아귀에 둔 사탄의 위력을 말합니다.
하늘에서 사탄이 번갯불처럼 떨어졌다는 것은 사탄이 그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들이 평화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평화의 소식을 받아들였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속박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것은 사람을 해치는 독성과 마성을 제압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삶에 저항하고 그 파멸에 이르는 삶에 순응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물리치고자 했던 적을 무력화시킨 사실을 기뻐하기보다는 내가 누리는 하늘의 삶을 기뻐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우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현실의 장벽을 어떻게 부술 것인가 부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삶이 무엇인지 찾고 그 삶을 스스로 누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장벽이 무너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졌기에 사람들이 평화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곧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맘몬의 질서, 몰록의 희생체제를 부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새로운 대안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을 찾아 살아가는 것이 맘몬의 질서, 몰록의 희생체제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대안은 적에 대한, 또는 현실의 장벽에 대한 증오에서보다는 내가 누리고자 하는 삶의 꿈, 그 꿈을 추구하는 삶의 기쁨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하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 저번주간 수요강좌 시간에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보았지요? 그 영화에서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 장면을 기억할 것입니다. 빌라도가 말하지요. 무력으로 항쟁한 젤롯당보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파한 예수야말로 로마제국에는 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왜 위험할까요?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을 나누는 데 권력이 자리할 틈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욕 자체를 무력화시킵니다. 하늘의 삶을 사는 것, 하늘의 삶을 선취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위력을 지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바로 오늘 우리의 세계 현실 가운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수년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우루과이의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삶과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비서나 경호원은커녕 부인이나 자녀도 없이, 다리 저는 개와 함께 다니며, 손수 장비를 들고 이웃집을 수리하기도 한 그는 간디 이후 자발적 가난으로 산 유일한 정치적 지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월급의 90%를 빈민주택기금으로 기부하고, 유일한 재산인 낡은 차로 출퇴근하는 길에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고, 단 한 번의 비리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최고의 정치는 정직이라고 하면서 대통령도 누구도 숭배하지 말라고 한 그는 누구보다도 빈민의 벗이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난 인생을 간소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런 삶이 주는 여유가 좋다”고 말합니다.
2012년 리우 환경 정상회의에서 행한 그의 명연설의 일부입니다.
“시장경제가 시장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자원을 찾아 세계 곳곳을 다니는 세계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계화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이런 무자비한 경쟁에 바탕을 둔 경제시스템 아래서 우리가 연대나 더불어 살아가자는 논의를 할 수 있나요? 어디까지가 동료이고 어디까지가 경쟁관계인가요?...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인류가 만든 이 거대한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 같은 소비사회에 통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량소비가 세계를 파괴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 아닌가’라고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개발이 행복을 가로 막아서는 안 됩니다. 개발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만 합니다. 개발은 행복, 지구에 대한 사랑, 인간관계, 아이 돌봄, 친구 사귀기 등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은 바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23일에 열린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는, 이제는 유명해진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참석하여 정상들을 향하여 일침을 가했습니다. 요트 하나에 의지하여 2주간 대서양을 항해하여 건너간 것부터 화제가 되었습니다.
“미래세대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 만일 당신들이 우리를 저버린다면, 우리 세대는 결코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각국 정치 지도자들은 돈 타령과 영구적 경제성장 타령만 하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는 매서운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그의 사적인 생활 또한 놀랍습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새 옷은 사 입지 않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 결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나 혼자 변한다고 세상이 변하겠느냐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부터 변해야 세상이 변하지 않겠느냐고 외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 나라의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지난 여름 박형규 목사의 삶과 신학사상을 추적하면서 또한 역시 경외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엄혹한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예닐곱 차례에 걸쳐 투옥되는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국가폭력에 의해 교회공동체마저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의 고귀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손상당하지 않은 그분의 정신세계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와 싸우다 보면, 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대상을 닮아간다고 합니다. 이른바 과거 ‘민주인사’들이 시절이 바뀌면서 어떤 면에서 더욱 권위적인 모습을 띠게 되는 것도 그 일례일 것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박형규 목사는 1970 ~ 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이른바 가장 유명한 민주 ‘투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그저 투사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분의 삶과 신학은 비장한 투사로서 활동을 배제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과 질기게 싸웠으니 당연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의 삶과 신학을 “하느님 나라를 산 자유인”으로 결론 맺었습니다(최형묵, “박형규 목사의 삶과 신학 - 길을 열어간 발자취를 따라서”). 그분은 그렇게 싸우는 과정에서도 결코 자신의 영혼을 손상당하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춤추는 자유인”이라는 이름이 그분에게 더 어울릴 것입니다. 자신의 삶 안에 이미 하늘의 삶을 체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늘의 삶을 살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 말씀은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땅의 나라를 살아가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땅 위에서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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