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의 은혜의 해 - 이사야 61:1~3[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1-05 16:07
조회
28551
2020년 1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주의 은혜의 해
본문: 이사야 61:1~3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 첫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로서는 20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0주년기념예배는 다음 주일에 드리기로 하였으므로, 그 의미를 새기는 것은 역시 다음 주로 미루겠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주어진 말씀을 통해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마음가짐을 새삼 가다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본래 이사야서의 말씀으로서보다는 누가복음(4:18~19)에서 예수님의 선포로 더 잘 알려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는 첫머리에 선포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당신의 삶의 의미를 만천하에 공표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말씀을 본래의 문맥에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본문말씀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선포되었을까요? 본문말씀은 이른바 세 번째 이사야의 유명한 예언의 한 대목입니다. 바빌론의 포로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귀환하였지만, 여전히 혼란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 표현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두 번째 이사야의 메시지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말씀은 두 번째 이사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고난의 종 메시아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선포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익명의 하나님의 종의 선포입니다. 그 하나님의 종이 누구일까요? 두 번째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42:1~4; 49:1~6) 하나님의 종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것은 구원자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구원자의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역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의 종 자체가 그렇게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 뜻을 깨달은 모두의 역할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그 종이 고통받는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포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여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이 하나님의 종의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정말 오래된 꿈, 성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초점입니다.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에 관한 예언에서만 강조되고 있는 초점이 아닙니다. 성서가 가장 뚜렷하게 강조하고 있는 초점입니다.
그 기쁜 소식은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포합니다.
상한 마음을 싸매어 준다는 말에서 우리는 고난의 종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이사 42:3). 오늘 우리는 그 의미를 더더욱 깊이 절감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첫 손길,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출발점은 바로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속박과 지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한다는 것은,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보다 좀 더 구체적인 현실의 어떤 변화를 뜻합니다. 그것은 채무로 속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는 현실을 뜻합니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라고 할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때 그것이 곧 주님의 은혜의 해요, 야훼 하나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는 곧 다른 말로 희년(기쁨의 해)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 원상태로,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는 때입니다. 야훼의 날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라 되어 있어, 적대자들을 물리친다는 의미가 두드러져 보이기는 하지만, 본래는 재건과 회복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본래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희년, 회복을 이루는 대전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선포는 현실의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그 예언이 선포되었을 때 사람들은 변합니다.
본문말씀은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어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괴로운 마음을 떨쳐 버리고 그 마음에 찬송이 가득 차게 된 사람들은 스스로 공의의 나무,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역사의 대전환으로, 상처를 겪고 고통을 겪는 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치유받고 회복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성취될 때 비로소 역사의 대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1~2절 말씀을 다시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했을 때의 스스로의 자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더불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겹치는 삶의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진정한 구원의 표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기쁜 소식을 접하고, 상한 마음을 위로받고,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고, 갇힌 상태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 살 때 우리는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누립니다. 우리가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총을 누리게 될 때, 오늘 예언의 말씀처럼 우리는 재 대신 화관을 쓰고, 슬픔이 아닌 기쁨의 기름을 바른 것과 같고,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하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처럼 됩니다.

놀라운 삶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희망이요, 교회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처럼 그리스도인 하나하나, 교회 하나하나가 우뚝 서 있을 때 그 자체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절망하고 좌절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면 우리의 존재는 결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고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과연 도달할 수 없는 허망한 꿈일까요? 만일 그것을 허망한 꿈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며 우리가 교회공동체를 이뤄야 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시혜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에 그 감사함을 우리의 삶으로 나타내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언의 말씀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랍니다. 빈궁한 삶 가운데서 귀가 번쩍하는 기쁜 소식을 듣기 원합니다. 내 상한 마음을 그 누군가가 감싸매 주기를 바랍니다. 그 뭔가에 묶인 상태에서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갑갑한 세상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바라는 그 삶을 누구나 예외 없이 살기를 바라며, 그러기에 그 길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삶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사셨고, 몸소 상처를 입었고, 몸소 매였고, 몸소 갇혔습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의 그물망 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안에 매여 계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가운데서 누리는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보여주셨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위로하셨고, 매인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셨고,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 뜻을 따르는 교회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선포하면 언제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일처럼 느낍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선포한 고난의 종의 의미, 그리고 그렇게 동일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알면 꼭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연약한 사람들의 처지를 알고, 그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알 수 있는 진실, 그것을 오늘 본문말씀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와 행복을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 소중한 것을 일깨우며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상처를 안고 있지만 오히려 상처를 안고 있기에 그 고통을 잘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누구든 예외 없이 뭔가에 매여 바둥대는 삶을 삽니다. 그러기에 그 고통을 알고 서로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 혼자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처할수록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서로 도움을 주는 존재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꽉 막힌 상황에 부딪힙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듯한 상황을 접합니다.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그 상황으로부터 헤어 나오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갇혀 있는 그 어떤 상태에서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해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은 영혼이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합니다.
너무 평범한 진실 아닐까요? 오늘 말씀은 그 진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 너무나도 평범한 진실을 믿고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가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와 같다는 것을 느끼며, 진정으로 삶을 기쁘게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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