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땅히 가야 할 길 - 누가복음 2:41~5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1-03 13:27
조회
9054
2021년 1월 3일(월)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마땅히 가야 할 길
본문: 누가복음 2:41~52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새해 첫 주일, 곧 신년주일이자 동시에 우리 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2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제부터 22년째를 시작하는 주일인 셈입니다. 우리세대에 겪어보지 못했던 특별한 재난의 상황 가운데서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 더불어 성년으로서 포부를 펼쳐야 할 교회가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시간의 의미가 겹쳤습니다.

그 중요한 의미가 겹친 주일, 또한 교회절기상 성탄 둘째 주일이 되는 오늘 우리는 소년 시절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먼저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를 전한 후에, 8일 후 아기 예수의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그 부모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실을 전하고, 이어 12살 때에 예수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통상 관례에 따르면 소년들은 13살이 되어야 종교적 제의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예수는 12살에 유월절 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시 환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의 부모가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는데, 부모는 그것도 모르는 채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가다가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예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대개 소규모 가족 단위가 아니라 친인척 등 대규모 가족, 그리고 동향 사람들이 함께 움직였던 순례길이라 충분히 있음직한 상황이었습니다.
일행 가운데 예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부모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예수를 찾습니다. 예수가 일행 가운데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하룻길을 걸었을 테니, 예수가 일행 가운데 없다는 사실을 안 날부터 치면 하루 동안 되돌아간 날이 둘째 날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성전에서 예수를 찾은 날이 셋째 날이 되는 셈입니다.
성전에서 소년 예수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선생들은 율법학자들을 말하는데, 누가는 딱 이 대목에서만 이들을 선생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려지고 있는 상황은 당시 율법학자들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의 교육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들은 일정한 교훈을 가르치고 학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게 함으로써 깊이 있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년 예수가 선생들 가운데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다는 것 자체로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진지한 학생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소년 예수가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듣고 경탄했다고 합니다. 소년 예수의 문답 내용이 비범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장면을 보고 놀란 부모는 대번에 외칩니다. 물론 여기서 부모가 놀란 것은 소년 예수의 문답 내용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파악할 경황은 없습니다. 부모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 남아 율법학자들 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어떤 부모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부모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년 예수는 그러한 부모를 보고 태연스럽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율법학자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것처럼 이 대목에서 성전 또한 부정적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성전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마땅히 성전에 있을 것을 몰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 부모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당연히 아들이 자신들과 동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이야기가 엉뚱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모습은 너무나 평범합니다. 이야기에서 그려지고 있는 모든 면에서 세상의 다른 부모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아들 예수의 특별한 언행이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어쩌면 예수와 그 부모의 대면은 상당히 결연한 장면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결연한 분위기와는 달리 소년 예수가 부모를 따라 다시 나사렛으로 갔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고 전합니다. 물론 너무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예수의 어머니는 그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성장해가면서 지혜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들부터 더욱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 이야기는 비범한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린 시절에도 비범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은, 아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단순한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듯, 매우 의도적인 성격을 띤 이야기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요체는 소년 예수가 비범했다는 사실을 단순히 전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비범함이 무엇이었는지 밝혀 주는 데 있습니다. 소년 예수의 비범함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그 자신의 독립적인 행동입니다. 열두 살이었다는 것은 더 이상 부모의 품에 안겨 움직여야 하는 아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 발로 버젓이 움직일 때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즈음 예수는 분명하게 자기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품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소년으로서 예수는 부모의 보살핌 가운데 있어야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자신들의 품을 떠난 아들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이야기는 두 번째 요체를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요체는 곧 소년 예수가 부모를 향해 한 말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여기서 예수의 말이 당위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데, 뭘 염려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 부모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들과 있어야 할 예수가 왜 그곳에 홀로 남아 있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년 예수는 부모 곁을 떠난 것이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른 마땅한 일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육신의 부모 품으로부터 결별을 뜻하며, 그것은 곧 진정한 부모의 품에 안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소년 예수가 자신의 삶의 전환을 미리 예고한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두 가지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적인 필연성의 차원과 당위적인 필연성의 차원입니다. 그저 생존을 위한 차원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뭔가 의미를 추구하는 차원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상사, 그리고 그 먹고 사는 일상사를 안전하게 누리기 위해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공동체의 존속과 관련되는 차원이 있다면, 그것을 뛰어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차원이 곧 어떤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차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것을 묻는 차원입니다. 보다 더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차원입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묻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는 차원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차원이며, 그에 따라 진정한 윤리적 삶을 추구하는 차원입니다.
물론 일상적으로 먹고 사는 삶의 차원이 아예 윤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름의 합목적적인 법칙이 있고 윤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생존과 보존의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차원은 그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와 윤리의 세계를 뜻합니다. 내가 특정한 집단에 속한 일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법도의 차원과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법도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분간할 수 있다면, 그 구별된 차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사실적인 필연성의 차원과 당위적인 필연성의 차원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그 상황에서 예수의 선택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부모의 입장이 사실적인 필연성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예수가 말한 마땅히 있어야 할 아버지의 집은 당위적인 필연성의 세계를 말합니다. 육신의 부모의 세계가 여러 가지 인습에 매여 있는 세계라면,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는 그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책임이 따르는 세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소년 예수의 독자적인 행동과 말은 그 선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공생애는 바로 그 마땅한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결연한 의지를 피력했던 소년 예수가 다시 나사렛에 내려가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았다고 전하고 있는 점입니다. 아직 어리니까, 아직 부모님의 품 안에 있어야 할 때이니까 도리 없이 그랬다는 이야기일까요?
이 이야기는 인간이 대면하는 삶의 실제를 말하는 것이며,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대면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로 분투해야 하는 현실이며, 그 안에서 어떤 관례와 도덕에 맞부딪히는 현실입니다. 바로 그 현실 안에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간 예수의 삶을 예고하는 결말입니다. 그 현실 때문에 예수가 선택한 뜻이 묻혀버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가운데 그 뜻을 실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생애의 행보를 압축해서 예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성장하면서 지혜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그저 인습적인 가치관의 기준에서 그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다는 것은, 예수의 언행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마음을 쏟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가운데 예수가 걷고자 하는 길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고 지혜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길, 교회가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엄연히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을 지키는 길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좌표를 잃어버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분, 교회로서 본분 또한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이전에 인간으로서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어째서 잘 변화되지 않고 인간이 어째서 잘 변화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보다는 자기를 내세우고 이기는 길을 따르고자 하는 유혹에 쉽사리 빠지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말할 것 없거니와 고상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조차도, 아니 오히려 더 그 유혹에 쉽게 빠지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 심지어는 주변에서 보는 ‘변절자’로 불리는 이들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옳은 길을 마땅히 따르는 길이 힘들게 느껴지고 지칠 때 사람들은 묘안을 찾아 이기는 길의 유혹에 빠집니다. 이길 가능성이 높은, 힘 있는 편에 편승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노력한 만큼 성과와 보상을 기대하기에 이해 못할 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포기하고 이해득실과 성패에 매일 때, 그 결과는 변함없는 기득권의 강화일 뿐입니다. 반면에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간 결과로 누리게 되는 열매는,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의 결과로서 다가오는 것인 만큼 모든 사람이 누리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과연 어떤 길인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얼마 전 한 신학대학원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도중 “예수께서 당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에 비춰 볼 때 이룬 게 뭐가 있느냐?” 했더니 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뤘잖습니까?” 맞습니다. 그 보편적 구원을 이룬 방법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랑을 실천한 삶이었습니다. 지난 연말 혹한 가운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해고 없는 세상을 바라며 단식하는 분들을 찾았던 현장에서 후배 목사가 말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답하기를 “그런데도 이룬 게 없지 않느냐?” 했더니 거꾸로 “그 과정이 중요하잖아요?”라고 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각오, 성년의 포부를 펼쳐야 하는 시점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의 각오,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그 삶의 길, 마땅히 따라야 할 그 길을 따르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 길에서 지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결과로 누리는 열매가 훨씬 값진 열매라는 진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한다는 진실을 기억하며,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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