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11-23 21:22
조회
925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63회 총회 주제강연

2015.11.23(월). 오후 1:20~2:00 / 서울 복음교회

주제: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초빙교수 / 기독교윤리학)



1. 에큐메니칼운동 100년의 역사를 바라보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출범한 이래 지난해로 9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해 100주년을 향한 각오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또한 내후년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의미가 함께 겹쳐 있기에 오늘 이 땅에서 교회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더욱 각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지나온 90년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였습니다. 또한 그 격동의 현대사 가운데 한국 교회가 급성장하여 한국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그간 한국의 역사와 교회 안에서 세계의 일치를 위한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의 구심으로서 역할해 왔습니다. 그 과정은 영욕을 함께 하였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사회적 계몽과 봉사는 물론 교회간의 협력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민족사적ㆍ교회사적 과제 앞에 때로 무력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한국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지속되었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하여, 또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교회간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헌신하였던 것은 세계 교회가 주목할 만큼 빛나는 성과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한국 교회는 고유의 신학적 전통 또한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된 이후 교회가 오히려 퇴행적 뒷걸음으로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를 새롭게 하지 못하는 한계 안에 있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한국 교회를 신학적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 또한 현저하게 상실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100주년의 역사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그간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돌아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 몫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장차 나아갈 바를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라는 이번 총회의 주제는, 현재 교회가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모색하려는 문제의식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주제는 오늘의 교회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흔들리고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서 존재의의를 다하는 교회로서 바로 서기 위하여 광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광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을 이겨내신 바로 그 광야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라는 이번 제63회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신 그 사건을 통해 오늘 교회를 진단함과 아울러 그 대안을 찾으려는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2.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


오늘 우리의 주제의식은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 우리의 교회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오랜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서 비단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 문제의식이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은 교회가 수없이 과오에 빠진 적이 있고, 그 때마다 그 과오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와 기대 또한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문제의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경우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19세기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야기일 것입니다.  

16세기 어느 날 스페인 세빌랴, 신의 영광을 위하여 백 명에 가까운 이교도들이 화형에 처해진 사건이 일어났던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그 동요의 현장에서 대심문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합니다. 그리고 심문을 시작합니다. 대심문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은 사실을 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악마가 주고받은 세 마디 가운데 인생사의 모든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고 보는 심문관은, 과연 그리스도와 악마 사이에서 누가 옳은지 따집니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어 엉뚱하게 허황된 희망만을 심어준데 반해 교회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욕망을 용인하고 잘 해 왔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내쫓는 것으로 극시는 마무리됩니다.

교회의 영화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거스르는 것으로 가능했다는 통찰입니다. 오늘의 교회 또한 동일한 과오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흔들리는 교회”라는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겨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 유혹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의 교회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겨낸 그 유혹의 실체를 다시 재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받은 세 가지 유혹은 우리가 일상의 삶 가운데서 떠나지 않는 유혹의 실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유혹은 너무나 명백하게 잘못된 길, 또는 너무나 명백하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유혹은 항상 달콤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쉽사리 선택할 수 있고 또 안락함을 누리게 해 줌으로써,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것들로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바로 그러한 유혹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악마는 40일을 금식해서 시장한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라”라고 유혹합니다.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가장 일반적인 물질의 유혹, 소유의 욕망, 물질적 번영의 유혹, 곧 경제적 유혹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삶과 병행하는 영적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일상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영적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 교회가 물질주의로부터 자유롭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요? 놀라운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부재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이 좋아 ‘민생’(民生)이지 실상은 경제 제일주의에 지나지 않은 유혹에 맥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마저도 재정과 교인수에 의해 평가하며 성장주의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번영의 신학은 드높이 외쳐지고 있지만 정의의 신학은 들릴 듯 말 듯 미미하기 그지없습니다. 3천억원짜리 예배당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지만, 약한 지체를 돌보는 일은 구차스럽게 여기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실상입니다. 과연 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내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유혹합니다. 이것은 권세와 명예의 유혹, 곧 정치적인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비단 권세와 명예를 탐하는 것으로 다가오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그 권세와 명예에 의존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고 답하였습니다. 그 어떤 것도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섬김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권력과 지위를 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권력과 지위를 누리는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노예적 삶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 교회는 권력의 우상에 매여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여야 하고 더 우월한 지위를 누려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은 지배의 욕망을 강화시켜줄 뿐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성장하고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한국 교회가 하나의 거대한 권력집단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권력을 지향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관력관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민주주의가 부재하고, 목회자는 하나님과 같이 떠받들어지는 반면 평신도들은 그저 수동적인 존재로만 간주되는 교회의 현실은 교회 자체마저도 권력의 우상숭배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은 그 믿음 안에서 모든 형제자매가 공평한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를 섬기는 삶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과연 한국 교회가 그 믿음에 충실할까요?

세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성경 말씀을 들춰내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합니다. 이 유혹은 말씀으로의 유혹, 신앙으로의 유혹, 곧 종교적인 유혹 또는 주술적 신앙의 유혹입니다. 신앙을 가졌다 자처하는 이들이 밥 먹듯이 범하는 유혹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는 한마디로 일축하셨습니다. 기적을 바라고 놀라운 일을 바라는 믿음, 그런 놀라운 일이 내 눈앞에 펼쳐져야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말합니다. 일상의 삶 자체가 여일하게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삶,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가 주술적 신앙에 유혹에 빠져 있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다고 믿고 스스로에게 좋은 일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믿는 믿음은 주술적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기도는 주문으로 전락하고 하나님은 도깨비방망이로 전락할 뿐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는 복을 비는 기도 소리는 높지만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스스로의 거듭남과 세상의 변화를 구하는 기도 소리는 너무나 미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기쁜 일을 통하여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고통 가운데 빠져 있을 때조차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더욱 절실하게 말씀하신다는 진실을 예수께서는 일깨워 주셨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과연 그 깨우침 가운데 있을까요?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라는 주제는, 지금 우리의 교회가 이상과 같은 악마적 유혹에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그 유혹을 물리치신 것처럼 한국 교회 또한 그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거듭나야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바로 위험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장이기에 거꾸로 연단의 장소이자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그 광야는 비단 지리적 공간으로서 외지고 황량한 곳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온갖 시련과 유혹이 끊이지 않는 우리의 삶의 현장 그 자체가 광야라고 할 것입니다. 그 광야는 욕망과 유혹의 실체, 그 마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삶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그 광야에 나선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욕망과 유혹의 실체, 그것이 갖고 있는 마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뜻하고 그 가운데서 그 욕망과 유혹을 이겨내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시련과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의 현장은 고통스러운 광야로 남을 것이요, 거꾸로 그 시련과 유혹을 물리리치고 거듭난 삶을 살게 된다면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로 나아갔다는 것은 바로 삶의 현장에서 온갖 유혹과 맞서 싸웠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유혹에 맞서 승리하였습니다. 성서는 광야에서 그렇게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민중들의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고 증거하신 하나님 나라는 곧 이 말씀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억눌린 사람에게 해방을 맛보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역을 오늘의 현실에서 구현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3. 시장의 우상이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 속에서 교회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 이 주제의 의미를 환기하며, 우리는 오늘 교회를 흔드는 유혹의 실체를 직시하였습니다. 교회가 그 유혹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흔드는 유혹의 근원을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면한 유혹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한 언제나 직면하게 되는 유혹이지만, 그것이 오늘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고 강화되는 데에는 오늘 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그야말로 공중의 권세로서 ‘시장의 우상’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 전환』이라는 저작에서 오늘의 시장경제체제를 ‘사탄의 맷돌’로 비유하고 있는 칼 폴라니(1886~1964)는 우리 시대의 정치ㆍ경제적 기원을 밝히는 가운데 의미심장한 진단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 책에서 폴라니는 인류역사에서 시장은 늘 존재해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회 안에서 작은 한 기능을 담당했을 뿐 오늘날처럼 전 사회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도저히 상품이 될 수 없는 자연(토지)과 인간(노동력)마저도 상품화하는 오늘의 시장경제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인위적인 것으로, 인류가 최근세의 역사에서 경험한 현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시장이 사회 안에 묻혀 한 기능을 한 것과 달리 거꾸로 시장이 사회 전체를 집어삼키는 현상은 최근의 역사적 현상일 뿐으로, 그야말로 ‘거대한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시장경제체제가 사회를 집어삼키는 상황 가운데서 사회를 보호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지켜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운동을 추동하는 정신적 기원이 성서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역사가의 놀라운 혜안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폴라니는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정신으로 세 가지를 꼽는데, 그것은 첫째 죽음에 대한 깨달음, 둘째 자유에 대한 깨달음, 셋째 사회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첫째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구약성서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인간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 거기서 인간은 오히려 그 유한한 삶의 한계 안에서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자유에 대한 깨달음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나타나는데, 모든 개인의 인격 하나하나가 우주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라는 자각이 그것입니다. 셋째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산업사회에 이르러 비로소 이뤄진 것이지만, 역시 성서의 유산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칼 폴라니는 바로 그 정신으로 인간은 모든 종류의 불의와 자유를 억압하는 조건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는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 통찰은 오늘 세계 안에서 유혹에 흔들리는 교회를 향하여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과연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4. 살고싶지 않은 오늘 한국사회의 현실과 교회의 과제


오늘 세계가 온통 시장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러한 풍조를 이끄는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한국사회는 그러한 풍조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통계지표가 있지만, 단적으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높은 자살율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살고 싶지 않은 사회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장의 우상이 절대화되고 있는 탓입니다. 달리 말해 자본의 이윤추구는 무한히 보장되고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과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보장은 안 되는 현실 탓입니다.  

지난해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로 커다란 충격에 빠졌고 그로 인한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참사는 자본의 이윤추구는 무한히 보장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과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에는 무관심한 바로 그 현실 가운데서 발생했습니다. 그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와 같은 재난은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구조화된 재난이 일상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지난해 산업재해로 인해 죽음에 이른 이들이 세월호 참사로 죽음에 이른 이들의 여섯 배가 넘는 1,929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같은 일을 하고도 적은 임금과 상시적인 해고 위협 속에서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삐 풀린 자본의 횡포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더욱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비상하게 직시하며 그에 대한 실질적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금년초부터 한국 교회가 그러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모색해왔고, 마침내 지난 11월 3일 비정규직대책 한국교회연대가 발족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교회가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서,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한동안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 가운데 등한시되어 왔던 노동선교의 과제를 복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제개발 시대 노동선교는 매우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민중운동이 성장하고 노동운동이 성장하면서 그에 대한 교회의 역할은 줄었습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고도화된 조건에서 오히려 더 궁지에 몰린 노동자의 상황에 직면하여 교회가 새삼 노동선교의 과제를 감당하게 된 셈입니다.

또한 역사적 사례에 견준다면 그것은 오늘날 사회국가 내지는 복지국가로서 독일을 형성한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19세기 ‘내방선교’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해외선교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내방선교는 자본주의적 산업화로 인한 양극화 현실 가운데 가난한 노동자 민중들의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것을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사회국가 또는 복지국가 독일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노동자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대처하는 것은 살고 싶지 않은 한국사회(헬 조선)를 바꾸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비정규직대책 한국교회연대는 몇 가지 주요한 사업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노동인구의 절반이 비정규직인 현실, 경악스러울 만큼 높은 산업재해 발생 빈도, 노동자의 정당한 쟁의행위마저도 처벌대상이 되는 불합리한 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여러 노동자들에게 다가서는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둘째,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노동현실을 넘어서기 위하여 국가사회에서 구현되어야 할 노동보호 정책 과제들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일, 예컨대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반해고 요건 완화, 성과 차등임금제, 비정규사용연한의 4년 연장, 파견대상의 확대에 대응하여 해고요건 강화, 최저임금 1만원, 상시업무 정규직화, 파견노동 근절 등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셋째 그동안 교회가 업적주의와 성장주의에 빠져 노동을 경시하는 한편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금기시해 온 것에 대해 반성하며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선포하고 노동권 보호에 앞장서는 풍토를 확산시켜 가는 일이 그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노동선교, 그것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교회의 존재의의를 드러내주는 유일한 과제일 수는 없습니다. 이미 세계적 차원에서 에큐메니칼 신학이 공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의ㆍ평화ㆍ생명을 지향하는 많은 과제들이 교회 앞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의 노동선교는 시장의 우상이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 가운데서 정의ㆍ평화ㆍ생명을 구현하기 위한 첫걸음에 해당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 핵심에 도달하는 과제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돌아간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다시 돌이켜 민주주의와 인권을 회복하는 과제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오늘날 노동자들은 한갓 소모품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심각한 퇴행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현실을 바로잡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스스로의 존엄함을 누리고 일하는 보람을 만끽하는 삶이 보장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이루는 데 교회가 기여하자는 것입니다.


5. 맺음말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한편으로 한국의 기독교가 권력화되어 지탄을 받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언제나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 먼저 달려가 그들과 연대하고 헌신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을 구현하고자 애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한 것입니다.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의 현장에,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아픔의 현장에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함께 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바로 그 교회를 대변함으로써 이 땅에 희망을 선포하는 역할을 감당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을 혼란에 빠트리고, 우리의 정치 경제 종교적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시장의 우상, 맘몬의 우상을 물리치고 참 인간으로서 진정한 삶을 누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 그 길을 정진하는 한국 교회를 세우는 과제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번 총회의 과정이 그 과제를 분명히 하는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첨부파일 : NCC총회강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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