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현대사회와 교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6-02-19 01:01
조회
781
제51회 백양세미나 및 제14회 연세 신학인의 밤  

2016년 1월 18일(월) 오후 4시~8:30 / 연세대 동문회관 3층 대연회장

백양세미나 주제 <급변하는 현대 기술과 신학> 발제 1 “현대사회와 신학”에 대한 논평



김응교의 “현대사회와 교회 - 대안으로서 안디옥 공동체와 리더를 생각하며”를 읽고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초빙교수 / 기독교윤리학)



1.

애초의 주제는 “현대사회와 신학”으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응교에게 발제가 맡겨진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의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닌 인문학자로부터 색다른 신학적 통찰을 구하고자 하는 기대로 발제가 요청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논평자에게 전달된 글은 “현대사회와 교회”라는 주제하에 “대안으로서 안디옥 공동체와 리더를 생각하며”라는 부제가 붙은 글이었다. 그래서 처음 이 글을 언뜻 보았을 때 애초의 기대에서 살짝 빗나간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현대사회 상황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고, 또한 신학의 과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독을 하고 나서 발제자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었고, 또한 애초의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맘몬과 권력의 포로가 된 한국 교회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바로 그와 같은 교회에 대한  대안으로서 성서에 등장하는 초기교회 가운데 하나로서 안디옥 교회의 모형을 성찰하고 있다. 어쩌면 매우 단순한 논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논리 구조 가운데발제자의 현대사회와 신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2.

먼저 김응교는 이 글에서 현대사회 그 자체에 대한 장황한 분석이나 구구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 교회와 신학의 방향을 논하는 맥락으로서 ‘현대사회’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전제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의 세계를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내면과 영혼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역사적 현상으로서 자본주의는 그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상관관계에 주목했을 때 그 자본주의는 봉건주의의 신분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으로서 부르주아의 능동성을 구현한 새로운 사회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응교가 이 글에서 전제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이윤추구 논리를 절대화하는 가운데 사회 자체를 파괴하고 인간을 파괴하는 괴물과 같은 존재가 된 오늘의 고삐풀린 자본주의 체제를 말한다.  

김응교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그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안에서의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과 대안을 제시해야 할 교회가 거꾸로 그 포로가 되어 있는 현실이다. 바로 그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글의 밑바탕이다. 적어도 이 글에서 김응교에게 신학은 추상적인 어떤 언설이 아니다. 신학은 마땅히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교회의 언어이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물론, 신학은 마땅히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고전적 문제의식과 상통한다. 하지만 그 교회와 신학이 세상과 유리된 어떤 실체인 것은 아니다. 게토화된 교회와 신학이 아니라 소통하는 교회와 신학이어야 한다. 김응교에게서 그 교회와 신학은 특별히 고통 받는 사람들 “곁으로” 향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교회가 교회다워지며, 그 교회의 언어가 이 시대의 진정한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김응교가 말하고자 하는 바 요체이다.

바로 여기에서 성서에 등장하는 초기교회 가운데 안디옥 교회는 하나의 전범으로 제시되고 있다. 교회의 현대적 과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신학의 과제를 전망하는 데 초기교회의 모델을 되돌아보는 것이 과연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회의적으로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또는 그 때 성서의 증언이 그저 하나의 증빙본문(proof text)으로만 활용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다. 성서본문을 전제로 하는 설교의 경우 성서본문에 대한 해석이 필수적이지만, 어떤 신학적 과제를 모색하는 데 성서의 특정한 본문이나 사례 하나로 그 과제의 모든 측면을 포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설교적 형식으로서 성서본문에 근거한 주장은 매우 익숙하지만 어떤 과제를 모색하는 형식으로서는 특정 성서의 본문이나 사례에 의존하는 것은 안일할 수도 있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응교의 문학가적 상상력의 기발함이라고 할까? 어쩌면 대단히 진부한 방식의 논리 전개 형식 가운데서도 흥미로운 통찰력을 드러내주고 있다. 과거 한 시대의 안디옥 교회를 모형으로 삼아 오늘의 교회의 과제를 모색하는 것은 사실 상당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통찰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로서 역사의 의미를 떠올리게 되는가 하면,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전통을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재삼 떠올리게 된다.


3.

이 글에서 김응교는 교회의 과제를 여섯 가지로 집약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제는 초기교회 가운데 안디옥 교회의 모형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평신도 공동체의 교회와 신학, 둘째 이방인 공동체의 일상적 언어, 셋째 개인의 생산성을 올린 팀의 공동체, 넷째 기도하며 움직였던 그리스도인 공동체, 다섯째 “곁으로” 다가가는 사회적 영성, 여섯째 변두리, 새로운 중심주의, 이렇게 여섯 가지 과제이다.

첫째 평신도 공동체의 교회와 신학을 다루는 데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안디옥 교회 공동체가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평신도 공동체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오늘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지위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에리히 프롬의 ‘합리적 권위’의 개념을 빌어 지도자와 회중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힘에의 의존과 권력에의 복종을 강요하는 오늘 사회와 교회의 현실에서 섬김을 가르치고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구현하고자 했던 초기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환기하고 그로부터 대안을 찾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성을 갖는다.

둘째 이방인 공동체의 일상적 언어를 다루는 데서는 한편으로는 이중적 언어와 혼종적인 문화가 조화를 이룬 공동체의 포용적 특성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의 전파가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보다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여기서 김응교는 국문학도답게 오늘날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부적절한 언어 습관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언어는 사고를 형성하는 것인 만큼 교회와 신학의 형성에서 언어의 문제는 결코 부차적인 어떤 것일 수 없다.

셋째 개인의 ‘생산성’을 올린 팀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강조한 점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초기교회에 대한 정당한 평가이자 동시에 오늘의 사회와 교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초점을 환기하고 있다. 가혹한 이윤추구의 논리와 권력에의 의존 논리에 따라 각 사람을 철저하게 원자화하고 있는 오늘의 자본주의적 삶의 현실에서 개인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한껏 보장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는 ‘꼬뮨’을 초기교회로부터 상상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억지가 아니다.

넷째 기도하며 움직였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강조한 대목에서는 김응교다운 상상력이 더욱 돋보인다. ‘기도’를 강조하면 어떤 확신이나 열성을 강조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이 대목에서 김응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찰’의 힘이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를 뜻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곧 성찰을 뜻한다. 그래서 김응교는 성찰의 힘으로서 기도를 강조하고, 그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인문학적 상상력을 강조한다.

다섯째 “곁으로” 다가가는 ‘사회적 영성’은 이 땅 위에서 교회의 존재,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의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 그들과 함께 하는 몫을 부여받고 있다. 고통의 공감 범위야말로 공동체의 확실한 기준이 된다는 관점이 있다. 그 점에서 보편적 구원의 지평을 바라고 믿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스스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자에게까지 고통의 공감을 이루고 연대하도록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은 끊임없이 고통받는 이들 ‘곁으로’ ‘곁으로’ 다가서는 연대의 영성, 사회적 영성을 통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변두리, 새로운 중심주의는 사실상 이 글의 마지막 결론으로서 이 땅 위에서 곁으로 다가서는 종착지가 어디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행 1:8)이 말하는 바로 그 ‘땅 끝’이 아닐까? 그것은 기왕의 기득권 구조에서는 변두리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곳, 고통받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뜻한다.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마지막 결론은 강조하고 있다.


4.

한편으로 교회현장에서 목회를 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신학적 이론의 성찰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논평자의 입장에서 교회와 신학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논평자는 오늘의 한국 교회 현실을 진단하고 그 대안을 구현하고자 지금도 나름대로 분투하고 있다. 한 책에서 그 기본 방향을 다음과 같이 설정한 바 있다(최형묵, 『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길』, 이야기쟁이낙타, 2013). 기본적으로 민중의 고통의 현장에 다가서기 위해 소통하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오늘의 교회를 진단하고 나아가 대안적 교회를 재구성하는 여러 차원을 제시한 것이다.  

첫째는 독점적인 상층 정치구조에서 회중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정치구조로, 둘째는 서열화된 교회 직제에서 공평한 은사의 배분으로서 교회 직제로, 셋째는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예배양식에서 공동체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로, 넷째는 배타적 군림의 상징으로서의 교회공간에서 소통을 지향하는 교회공간으로, 다섯째는 차별의식을 조장하는 교회 생활언어와 성서번역본에서 공평한 관계를 지향하는 교회 생활언어와 성서번역본으로, 여섯째는 평신도들의 비주체성을 극복하고 능동적 주체로서의 평신도의 자각을 이루는 교회로의 변화로 그 방향을 설정해 보았다. 그리고 교회현장에서 그 방향대로 구현하고자 나름대로 분투하고 있다.

김응교의 글 “현대사회와 교회 - 대안으로서 안디옥 공동체와 리더를 생각하며”를 읽는 동안 무척 기뻤다. 내가 교회에 대해 갖는 생각, 그리고 교회에서 시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설정한 교회의 방향에 대해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얻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중요한 한 시기를 공유한 경험이 지속되는 문제의식의 공통기반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생각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아쉬운 면 또한 없지 않다. 그 까닭이 하나의 전범으로서 안디옥교회를 전제로 한 논의 방식 때문은 아닐까? 설교자이거나 성서주석가의 입장을 견지하기보다는 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인접 인문학 분야에 선 입장에서 더욱 발랄한 상상력을 펼쳐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물론 앞에서 말하였듯이 성서의 사례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는 격식 가운데서도 문학도의 발랄함과 신선함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혹시 성서의 사례로서 안디옥 교회의 모형을 전제하다 보니 오늘의 교회와 신학에 대해 더 충분히 말하지 못한 것은 없지 않은지 캐묻고 싶다. 언제나 그렇듯 앞에 있는 청중을 배려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 김응교다운 방식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적어도 발제자와 논평자 사이에서는 거의 자명하게 상식이 되어 있는 교회의 대안, 또한 그와 관련한 신학의 대안이 어째서 오늘의 현실에서 통용되고 있지 않은지 그 까닭을 캐묻고 그 현실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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