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 차별없는 사회를 향한 한·일 교회의 역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8-29 22:01
조회
964
한·일 NCC URM-이주민 협의회 주제강연
주제: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 차별없는 사회를 향한 한·일 교회의 역할
2017년 8월 28일(월) 11:00~12:00 / 기독교회관 조에홀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 차별없는 사회를 향한 한·일 교회의 역할


최형묵(NCCK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 비정규직대책한국교회연대 공동대표)


1. 시작하는 말

지난 해 말부터 올 초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촛불혁명의 과정은 진정한 주권자 혁명으로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중대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 세계에 보여줬다.” “서구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와 해로운 민족주의의 부흥으로 절망에 휩싸여 있을 때, 한국은 민중의 힘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방금 전했다.”(2017년 5월 10일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사).
굳이 이 평가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지난 해 말 정권의 충격적인 부패 스캔들로 당혹스러워했던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제 자긍심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인권의 가치가 중심이 되어 민주주의와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사회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있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한국의 새 정부는 그간의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를 새롭게 구성할 개혁적 정책들을 의욕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다. 지난 7월 새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한 것은 매우 반길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과거 민주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어 왔던 ‘차별금지법’의 제정에 관한 과제는 그 가운데 빠져 있다. 물론 100대 국정과제 가운데는 ‘차별 없는 일터 만들기’ 등 차별해소와 관련된 과제가 제시되어 있고, 또한 국회에서 논의중인 개헌안에 차별금지 조항을 강화하는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현재 한국의 새 정부가 차별의 문제에 대해 등한시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이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서 제외된 까닭이 무엇일까? 이미 2007년, 2010년, 2012년 세 차례에 걸친 입법 시도에도 불구하고 제정될 수 없었던 사정이 말해주듯 그 내용 가운데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내용이 있어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법안이 차별해서는 안 되는 조건은 “성별, 장애, 병력(病歷), 나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및 보호처분, 성적(性的) 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이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성적 지향’에 관한 항목이 동성애를 부추길 것이라는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이 그 법의 제정을 막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것이 사회적 논쟁의 실체이다. 차별을 해소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의욕적으로 정책을 펼치고 있는 새 정부마저 부담을 느낄 만큼 한국사회에서 차별에 대한 인식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시금석과 같은 사례이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사회적 공감을 이룰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마저 이의를 제기하는 사회적 논쟁의 유발 주체가 기독교 세력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특별한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 차별없는 사회를 향한 한·일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한·일 양국간의 공통의 상황을 공유하고 나아가 공통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오늘 우리가 직면한 불평등과 차별의 현상들

불평등과 차별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물질적 요소와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포함하여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뜻한다. 그 어떤 존재이든 각자는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갖기 마련이고 각기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차이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차이가 위계적으로 등급 매겨지거나 우열 또는 선악의 관계로 인식될 때 차별이 되며, 그 차별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불평등이 된다.
오늘 우리는 세계적 차원에서 매우 다양한 차별과 불평등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저마다 자유로운 개인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과거의 신분에 따른 차별이 상당 부분 해소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존재한 모든 차별이 그 나름의 고유한 역사적 조건을 갖는 만큼, 오늘 삶의 현실에서 또한 차별은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과거부터 지속되어 온 차별이 교묘한 형태로 재연되는가 하면 더욱 심화되기도 한다. 노동사회의 불평등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 안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차별 현상이라면, 그 차별에는 가장 오래된 양성간의 차별이 결합되어 있고 인종ㆍ민족ㆍ국적ㆍ출신 등 다양한 조건에 따른 차별이 가중되어 있다. 각각의 차별은 그 자체로 고유한 원인과 속성을 갖고 있지만, 많은 경우 그 차별들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그러기에 어떤 하나의 명백한 차별을 경험하는 사람은 또 다른 이유로 동시에 차별을 경험함으로써 심각한 고통의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차별의 현상들이 존재하지만, 한ㆍ일 양국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거나 서로 얽혀 있는 차별 현상들 가운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우선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 물결 가운데서 가장 뚜렷하게 경험하는 현상으로서 노동의 주변화와 격차의 심화 현상을 들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증대되고 있는 여러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 현상을 들 수 있다. 또한 한ㆍ일간 역사인식의 문제와 국가적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이 문제는 언뜻 보기에 한ㆍ일간의 특수한 역사에서 비롯되는 민족적 또는 외교적 문제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가 주제로 삼고 있는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정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다뤄야 할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협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각각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기에, 이 주제 강연에서는 그 각각의 문제들이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개략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2-1. 노동계급의 주변화 현상과 격차사회

지구화된 세계경제는 물자와 인간의 소통을 확대시키고 경제적 규모를 확대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매우 다층적인 차별적 위계질서를 동반하고 있다. 사람들의 경제적 형편과 삶의 질은 더욱 공평해진 것이 아니라 더욱더 심각한 격차를 안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안정된 고용 성장모델로 평가받았던 일본에서도 ‘격차사회’라는 말이 통용된 지 오래 되었고, 한국의 불평등과 격차는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이의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노동이 일상화되고 그에 따르는 노동계급의 주변화 현상이 현저해지고 있다.
비정규직노동의 증가는 노동계급의 양극화와 주변화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현상이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체제의 돌입과 함께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꾸준히 증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한 때 60%에 이를 정도로 급증하다가 최근 수 년 간 다소 감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자의 절반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불안정한 고용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소득격차의 측면에서도 심각성을 안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거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있다. 오늘 비정규직 문제를 노동계급 자체의 양극화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노동계급의 양극화와 함께 등장한 주변화된 노동계급은 전통적 자본주의적 산업화 시대의 ‘노동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통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노동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가 연상시키는 것은 대개 장기적이고 안정적이고, 일하는 시간이 고정된 일자리에 있으며, 조합에 가입하고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주변화된 노동계급은 이전의 노동계급이 지녔던 그와 같은 일체의 특징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아예 실업 상태에 있거나 불안정한 임시고용 상태에서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으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주변화된 노동계급의 주요 특징이다.
이처럼 기존의 노동계급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이들 주변화된 노동계급은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의미로서 ‘프레카리아트(precariat: precarious+proletariat)’라 불리고 있다. 일본에서 이들은 ‘프리타’(freeter: free+arbeiter) 또는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and Training)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프레카리아트화 되어가는 대상은 모든 세대 노동계급에 걸쳐 매우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타격을 입는 가장 두드러진 대상들로는 여성과 청년층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도 고령층, 장애인과 범죄자들, 그리고 특정한 사회 안에서의 소수 종족들이 프레카리아트화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부류로는 시민권 없는 거류민들(denizen)이다. 이 거류민들에는 매우 다양한 부류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부류로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 노동자들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시민권은커녕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극심한 차별적 임금을 받으며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현상이 단지 지역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현상들은 지구화된 세계경제질서 안에서 서로 영향을 끼치며 전 세계적 차원에서 프레카리아트화 현상을 강화시키고 있다.

2-2.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의 증대

2-2-1. 일본에서는 ‘재특회’(在日特権を許さない市民の会)를 중심으로 하는 ‘재일 코리안’에 대한 ‘혐오 발언’(Hate Speech) 문제가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한ㆍ일간의 특수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한ㆍ일간의 특수한 문제라기보다는 세계적 차원에서 보편적 문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지구화된 세계경제로 인한 광범위한 노동인구의 이동과 경제적 양극화의 현실 속에서 점점 강화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의 한 형태로서 오늘날 여러 나라들, 특히 발전된 나라들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은 특별히 지구화된 경제질서 가운데서 인종과 언어, 국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빈번한 이동과 접촉이 가능해진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이 주로 발전한 국가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 사실을 입증한다. 하지만 인종과 언어, 국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빈번한 이동과 접촉 그 자체가 곧바로 외국인 혐오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갖게 되는 사회적 집단의 존재가 그 내재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외국인 혐오증은 사회적 환경 안에서 자기 박탈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 요인을 특정한 집단, 곧 외국인들에게 돌려 공공연하게 증오와 혐오를 드러냄으로써 나타난다. 줄여 말하면, 지구화된 경제질서 가운데서 사회적 박탈계층을 양산하는 양극화가 오늘의 외국인 혐오증을 낳는 기본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각 나라 및 사회의 사정에 따라 그것은 일정부분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문화적ㆍ역사적 요인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재특회’가 외국 국적을 가진 주민 모두를 규탄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사회 내의 부라꾸민(部落民)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유독 재일 코리안에 집중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 혐오 현상이 자기 박탈감의 요인을 막연한 일반화에 기대어 특정 집단에 투사하고 그에 대해 증오와 혐오를 표출한다는 데서 어떤 형태이든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2-2. 일본에서 ‘재특회’의 활동이 문제시되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일베’(‘일간 베스트 유머’라는 인터넷 사이트의 약칭)가 문제시되고 있다. ‘일베’는 일본의 ‘재특회’와는 다른 여러 특징들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젊은 보수 우익을 표방하며 사회를 향하여 혐오발언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재특회’와 많은 부분 닮았다. ‘일베’는 유머를 코드로 하여 기존의 진보적 가치들을 전도시켜 희화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대상들을 겨냥하여 험오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들이 주로 혐오발언의 목표로 삼고 있는 대상은 여성, 특정지역(전라도), 진보적 시민, 그리고 진보적 정치인 등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인터넷상으로만 활동을 펼쳤지만, 2014년 세월호 유가족 단식 현장에 나타나 기존의 거리의 우익과 결합하여 ‘단식’에 반하는 모독행위로서 ‘폭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자극적이고 돌출적인 혐오발언과 혐오행위는 점차 상승기류를 타고 혐오의 대상을 얼마든지 확장해나갈 가능성을 안고 있다. 한국사회 또한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다문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만큼 인종주의적 혐오발언과 혐오행위는 미구에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 거주하는 절대다수의 외국인들이 인종혐오주의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는 조사통계의 결과, 그리고 실제로 이미 반다문화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 더욱이 일본사회보다 더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일베’류의 혐오행동이 사회적 불만의 왜곡된 형태로서 인종주의적인 혐오로 가시화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2-2-3. 한국과 일본은 성별 임금격차 면에서 서로 그 수위를 다투는 가운데 최근 수 년간 한국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극심한 성적 차별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하나의 예로서, 이를 통해 다른 여러 분야의 성적 차별 현상을 가늠하게 해 주는 척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근래 한국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여성차별에 더하여 여성혐오 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였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을 계기로 한국사회에 여성혐오 현상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강력범죄 피해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으며, 일상적 영역에서 공공연한 여성혐오 현상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양성평등에 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사회 각계에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로 증가하는 여성혐오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차별과 혐오 현상이 단지 의식상의 문제이거나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점증하는 여성혐오 현상은,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기존의 남성중심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고 남성의 권위가 약화되는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모든 혐오 현상이 그렇듯이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책임을 엉뚱한 대상에게 전가하는 전도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2-2-4.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한국에서는 군형법에 따라 성적 소수자가 처벌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차별금지 법안 역시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주장이 유독 퇴행적 기독교 보수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든 차별과 혐오의 논리가 갖고 있는 불온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불온한 욕망은 주류 한국교회의 고질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치부를 가릴 수 있고, 어떤 정치적 효과까지 거두게 될 때 그 증상은 더욱 깊어진다. 한국교회에서 그 불온한 욕망은 오랫동안 반공주의를 통해 표출되어 왔다. 여전히 반공주의 폐해의 영향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 반공주의를 매개로 동맹관계에 있던 정치세력이 약화되고 더불어 교회 스스로의 사회적 신뢰가 현저히 낮아진 상황 가운데서 주류 한국교회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배제 논리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단지 교회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 전반에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위험하다.

2-3. 한ㆍ일간 과거사 인식과 국가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의 문제

이 자리에서 우리는 한ㆍ일간 과거사인식과 국가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ㆍ일간 과거사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오래된 과제이지만, 특별히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양국 정부의 합의가 쟁점이 되고 있다.
2015년 12월 28일 한국과 일본의 외교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ㆍ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하는 합의사항을 발표하였다. 전후 70년을 맞이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그 해를 넘기기 전 한일 간의 예민한 갈등 상황을 해소하려 한 양국 당국자들의 노력의 결과라 볼 수 있지만, 그 합의가 명시한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ㆍ불가역적’ 해결이 이뤄진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엄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해 당사자의 입장이 전혀 반영되지 않아 그 합의가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 합의에 범죄행위의 주체, 그리고 그에 대한 반성과 책임의 문제가 언급되기는 하였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자금의 성격을 분명히 하지 않음으로써 반성과 책임의 성격이 모호해져버렸다. 게다가 일본의 총리가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별도의 총리 자신의 직접적인 표명 기회가 없어 그 전언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합의 이후 양국 당국자들의 엇갈리는 발언과 태도를 보더라도 과연 무엇이 어떻게 해결된 것인지 충분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ㆍ불가역적’ 해결이라는 선언 외에 사실상 알맹이 없는 외교적 타협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거론되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 ‘최종적ㆍ불가역적’ 해결이라 못 박고 싶어 했겠지만, 국민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합의를 수용한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아직까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당시 황급히 이뤄진 외교적 합의의 배경에 한ㆍ미ㆍ일 동맹관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서 한ㆍ일간의 갈등을 시급히 해결하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적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1945년 도쿄재판에서,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청산되었어야 할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는 미국주도의 국제적 역학구도 안에서 무마되었다. 적어도 한ㆍ일간의 관계 차원에 한정한다면 1965년 한ㆍ일외교정상화 과정에서 해결되었어야 했지만, 그 기회에서마저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 문제는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그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한ㆍ일 외교장관의 합의는 과거사의 잘못을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또 하나의 명징한 사례가 되고 있다.
1993년 고노(河野洋平) 담화 이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위안부’ 모집에 관한 강제성 등을 인정해 온 역대 일본 정부의 공식적 입장을 사실상 무색하게 만드는 아베(安倍晋三) 정부의 입장은 뿌리깊은 전후 일본사회의 속성에서 비롯된다는 일본사회 내의 비판적 성찰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시라이 사토시(白井聰)는 ‘영속패전론(永續敗戰論)’을 통해(白井聰, 『永續敗戰論 - 戰後日本の核心』, 2013) 전후 평화와 번영이 구가되던 시절 부정되었던 과거 ‘대일본제국’에 대한 긍정의 욕망이 장기침체 국면에서 되살아나면서 이전의 ‘명분[建前]’ 대신에 ‘속내[本音]’가 드러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에 의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속내가 아시아 각국에 대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도된 인식은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방해하고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의 문제를 회피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사회에 영속적인 패배를 안겨줄 수밖에 없다는 통찰이다. 이웃의 타자를 부정하는 배외주의와 차별의 논리가 일본사회 안에서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지를 밝혀주고 있는 통찰이라 할 수 있다.
이웃의 타자를 부정하는 배외주의와 차별의 논리는 오늘 세계 곳곳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저마다의 사회에서 그 현상을 야기하는 메커니즘은 역사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배외주의와 차별의 논리가 ‘동질성-본연성-순수성’의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Carolin Emcke, Gengen den Hass, 2016; [한국어판]  『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2017, 참조). 그것은 일단 자기의 범주 안에서는 숭고한 이념으로 떠받들어지지만, 그 자기의 범주 밖에 있는 타자에게는 어머어마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숱하게 경험해 왔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3.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한ㆍ일 교회의 역할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차별의 현실 가운데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까?
우선 한국과 일본의 교회는 각기 처해 있는 국가사회 내의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차별 없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몫을 맡아야 할 것이다. 세계화 또는 지구적 제국이 운위되고 있지만 여전히 오늘의 세계는 국민국가를 기본단위로 하는 질서를 이루고 있고, 그런 만큼 각기 국가 내에서의 주권자의 정치적 선택과 역할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형식상의 국체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든 오늘날 민주주의는 모든 정치체제에서 보편적 규범이 되어 있다. 그것은 각기 해당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자신이 속한 국가사회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몫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교회는 그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그 누구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구체적으로 제도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교회는 서로 다른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오늘의 세계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 안에서 해결될 수 없는 수많은 차별의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다양한 기원을 갖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거류민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문제, 그리고 ‘재일 코리안’ 문제 등은 그 구체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차별 현상의 경우 국민국가의 주권이 오히려 차별의 근원이 되기도 하며, 이 경우 그 주권은 폭력적인 역할을 맡는 셈이다. 이와 같은 차별 현상은 해당 사회를 민주화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제도와 문화적 기풍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차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접근방법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그 접근방법은 처음부터 국제적 차원에서의 공감과 합의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방향만을 확인한다면 이미 국제적 합의에 이른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 따른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복음의 보편성은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그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구체적인 해법은 그야말로 창의적인 발상을 수용하고 실현하려는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과 일본의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상호간 지원과 협력을 지속해 온 자산을 갖고 있다. 또한 국가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교류와 연대는 부단히 성장해가고 있다. 그간 피차의 사정으로 한ㆍ일 교회간 연대활동이 다소 침체되는 국면도 없지 않았지만, 이제 새로운 창의력을 동반하는 가운데 연대를 회복하고 더욱 굳건히 해야 할 때이다. 날로 긴장이 고조되고 그로 인한 불안을 빌미로 차별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동아시아 현실에서 한국과 일본의 교회간의 연대가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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