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16]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바울의 충정 - 갈라디아서 4:8~20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2-26 23:26
조회
1395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2월 26일 / 최형묵 목사


제16강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바울의 충정 - 갈라디아서 4:8~20


1. 율법으로의 퇴행 - 4:8~11


바울은 앞에서 기본적인 주장을 펼친 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을 향해 질책한다. 물론 그 질책의 목적은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의 마음을 되돌려놓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전에는 하나님 아닌 것들에 종노릇하였지만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아주시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아닌 것들’이라는 표현은, 실재하는 것과 인습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을 구별하며 인습에 의해 생겨난 것에 의존하는 것을 비판한 그리스 철학 전통에서의 발상, 그리고 한 분이신 하나님을 강조하며 다신론적 이교를 비판한 유대교의 발상과 통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교의 관습에 매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교인지 확정할 수는 없으나 바울은 그것을 ‘세상의 유치한 교훈’/‘세상의 원시종교들’로 통칭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그렇게 세상의 유치한 교훈에 빠져들고 있는지 바울은 질책한다. 이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교도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 곧 ‘세상의 원시종교’를 따르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킨다는 것은 유대교의 절기를 지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특정한 날과 절기에 따라 금기를 지키는 고대종교의 관습을 말한다. 우리의 전통에서 손 있는 날, 없는 날을 가리는 것과 같은 관습이다. 이 역시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교도로 환원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은 지금 바울이 대적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교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되 유대교의 율법 준수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절차로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여기에 미혹된 갈라디아 사람들을 질책하고 있다.

이들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는 바울의 주장 가운데서 우리는 두 개의 종교의 대립을 확인할 수 있다. 계몽된 종교로서 제의적이고 의식적인 요구와 준수로부터 자유로운 종교와 악한 세력에 대한 제의적이고 의식적인 보호체계로서 종교의 대립이다. 바울의 종교는 계몽된 종교이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는 인간을 관습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롭게 해 주는 존재이다.


2. 바울과 갈라디아교회의 우정 - 4:12~17


언뜻 보기에 12절부터 시작되는 구절은 앞의 논쟁적인 주장과 달리 매우 사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구절이다. 바울은 이 대목에서 논리적으로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가슴으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의 방식은 고대 헬레니즘 세계 안에서 서신의 일반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은 성격이다. 서신을 주고받는 관계는 매우 긴밀한 관계로서 ‘우정’을 바탕으로 한다. 이 대목은 그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바울은 자기가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되었으므로 갈라디아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바울이 지금 주장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인과 똑같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처음에는 행복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처음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 그 계기는 자신이 병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 병은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에 대해 개의치 않고 바울을 받아 주었다. 마치 하나님의 천사를 대하듯이, 그리스도 예수를 대하듯이 영접해 주었다. 여기서 바울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병은 어떤 병인지 확실치 않다. 고린도후서 12:7~10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바울의 치명적 약점으로서 그의 질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그것이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그 구체적 정황을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꺼림칙하게 여겨질 수 있는 질병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호의적으로 맞이해 주고 그의 이야기를 따라줬다는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바울에 대한 태도는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라디아 사람들과 똑 같이 된 것에 상응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바울에 대한 태도이다. 그런데 그 관계가 무너진 것에 대해 바울은 통탄하고 있다.        


3. 불순한 자들에 대한 경계 - 4:18~20


그 관계를 무너뜨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미혹했다. 여기서 그들이 ‘열심을 낸다’는 것은 주로 성적으로 유혹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바울은 그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떨어져 그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데 있다고 본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동등한 우정으로 대한 반면 그들은 일종의 상거래하는 듯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고 있다. 바울은 이런 표현을 종종 사용하고 있는데, 동등한 우정을 말하는 맥락에서 해산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피차간의 격을 달리하는 듯한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정을 훼손하는 표현은 아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이가 온전하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나타나기까지 그 고통을 감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리스도의 의미가 온전히 구현되는 갈라디아 공동체의 탄생에 대한 기대이다. 세상의 원시종교들에 매여 종노릇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에 대한 기대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바울은 지금 마음이 급하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바꾸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당장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지금 그러지 못하는 것이 바울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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