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21] 새로운 창조 - 갈라디아서 6:11~1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4-02 22:34
조회
1233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4월 2일 / 최형묵 목사


제21강 새로운 창조 - 갈라디아서 6:11~18


1. 새로운 창조 - 6:11~17


앞의 내용이 필사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면, 이 마지막 부분은 바울 자신이 직접 쓴 부분이다. 이와 같이 필사자에 의해 기록되고 발신자가 마지막을 덧붙이는 것은 일반적 서신의 양식이었다. 그 마지막 친필 부분은 서신의 진정성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대개 서신의 발신자가 특별히 환기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바울이 큰 글자로 썼다는 것은 전문적인 필사자의 서체에 비해 세련되지 못한 서체를 시사할 수도 있지만 그 문맥으로 보아 마지막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바울은 앞의 내용에서 일관되게 비난했던 이들을 다시 환기시키고 있다. 그들은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앞에서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던 사실을 꼬집는다. 그들이 할례를 강요한 까닭은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들, 그리고 그들의 할례 강요 대상이었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사실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면, 그 박해는 유대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유대의 전통을 따라 할례를 받게 한 셈이다. 바울이 보기에 할례를 강요한 사람들은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할례받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 단정한다.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실적/업적을 내세우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바울의 이 주장은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다(6:3)는 주장과 다소 배치된다. 그 주장에서 할례가 단순한 하나의 의식이 아니고 율법에 귀속되는 절차라고 본 것과 달리 여기서는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하나의 전술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을 통해 볼 것 같으면, 갈라디아 사람들이 율법에 빠져들게 된 어떤 정황도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단지 겉으로 보이기 위한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말의 진정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사자가 기록한 앞부분과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바로 앞부분 곧 5장의 전반부에서 말했던 육체의 행실을 유념하며 그와 직결되는 논리로 바로 그들이야말로 육체의 행실을 따르는 표본이라고 격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바울의 주장 역시 앞 부분과 논리적으로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할례를 강요하는 이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지만,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주장은 6장의 전반부에 상응한다. 6장의 전반부는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먼저 자신을 돌아볼 것을 강조하고,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자랑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땅히 바울은 그 본을 보여야 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세울 수 있을 뿐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보기에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편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의 편에서 보면 자신이 죽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할례를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더욱 보강된다. 율법을 따르는 삶은 기존 세상의 질서를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은 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삶은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업적을 내세움으로써 인정받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삶을 누린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기원한다. 바울의 입장에서 당연한 축복의 인사이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낯설다. 이 표현은 여기에서만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통 새로운 교회를 일컫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바울이 율법의 정신을 사랑이라고 집약하고, 그리스도의 법을 말하는 맥락과 유사한 맥락에서 사용한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아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뚜렷하게 분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바울의 반대자들이 스스로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라 지칭했던 것을 뒤집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 표현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 남아 있는 사람들을 언급한 것이 아닐까.

편지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바울은 이상한 주장을 덧붙이고 있다. 자신의 몸에는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 있으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편지를 마무리하는 마당에 느닷없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의 속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바울이 이렇게 장황한 편지를 써야만 했던 이유,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괴롭히는 것인지 재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의 근거로 내세우는 그리스도의 낙인은 자신이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따라 가르쳐 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2. 마지막 축복선언 - 6:18


이미 앞에서 축복의 인사를 한 셈이지만, 바울은 다소 생뚱맞은 주장을 한 만큼 다시 축복의 인사로 서신을 완전하게 종결짓는다.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하여 보다 친근하게 형제들로 호칭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심령에 있기를 기원한다. 그저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 것이 아니라 심령 가운데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는 표현은 그야말로 보다 깊은 내면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맨 마지막 ‘아멘’은 애초 서신에 기록된 것이라기보다 이 서신이 일찌감치 예배중에 낭독되었던 정황을 반영하는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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