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26] 믿음을 위한 투쟁 - 빌립보서 1:27~2: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5-07 22:48
조회
962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5월 7일 / 최형묵 목사


제26강 믿음을 위한 투쟁 - 빌립보서 1:27~2:4


1. 믿음을 위한 투쟁 - 1:27~30


앞의 내용이 어떤 면에서 교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이 대목에서부터는 권면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 첫 대목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싸움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교회가 일치단결할 것을 강조한다. 대전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분투가 필요하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독특한 의미변용을 동반하고 있다. ‘생활하다’라는 말은 통상 περιπατειν을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바로 그와 같은 의미를 πολιτεύει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은 ‘폴리스’에서 유래하는 말로 ‘폴리스의 시민이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착오나 오용이 아닌 의도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마치 ‘민회’(에클레시아)를 뜻하는 말을 곧바로 ‘교회’라는 말로 사용하게 된 것과 다르지 않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곧 기존하는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질서를 의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새로운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이 함께 하든 않든간에, 하나의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싸우라고 권면한다. 싸우라는 군사적 용어 자체가 이미 시사하고 있지만, 그렇게 싸워야 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대적해야 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울 것을 권한다. 빌립보 공동체가 대적해야 할 이들이 과연 누구였을까? 유대인 또는 이방인, 아니면 거짓 교사들, 또는 행정당국 등 여러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지만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거짓 교사들을 겨냥할 때 바울은 매우 격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3:2 참조) 이 대목에서 그들을 겨냥한 것 같지는 않다. 빌립보에 유대인 공동체가 미약하였다는 점에서 유대인일 가능성도 낮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행정당국의 박해를 받았기에(행 16:11 이하; 살전 2:2)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측해볼 수도 있지만, 공동체가 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도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빌립보 공동체 구성원들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동족들(아마도 이방인들)로부터의 일상적인 방훼 상황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방하는 이들과의 담대한 싸움은 훼방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요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징조라고 말하며 바울은 용기를 북돋는다. 더불어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만큼 복음에 충실하다는 증거요, 그만큼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대목에서 자신의 모범을 환기한다. 빌립보에서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고, 지금 이 편지를 통해 전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역시 그 박해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만큼 그대로 따르라 권한다. 빌립보 공동체 구성원들은 지금 자신과 ‘똑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빌립보 공동체 구성원들이 대적하고 있는 상대가 행정당국이었을 가능성을 유추해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박해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이 겪는 일반적인 곤경과 고난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 됨 - 2:1~4


앞의 권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투쟁에서 교회의 일심협력을 말했다면, 이 대목에서는 그 일심협력을 위해서 공동체 성원간의 화목을 강조한다. 공동체 성원간의 화목을 위한 구체적인 덕목으로 바울은 네 가지를 언급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사랑의 위로, 영의 교제, 자비와 동정심이 그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지향점을 일깨우는 것을 말하고, 사랑의 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과 상통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친밀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영의 교제, 그리고 자비와 동정은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이다. 이 권면은 빌립보 공동체에 그 덕목들이 빈약해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심정에서 비롯되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해당한다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밝은 권면에서도 드러난다.

이어지는 권면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같은 생각은 바울이 올바른 인간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로써(1:7; 롬 12:3,16; 15:5), 이어지는 말들은 같은 의미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의의를 지닌다. 계속 이어지는 권면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다툼(저열한 마음, 시기심)이나 허영(자기과시, 자랑)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한다. 여기서 바울은 겸손을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리스적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있다. 물론 이것은 바울만의 고유한 가치전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가치전도는 겸손에 대한 그리스 세계와 유대교적 세계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리스적 세계에서 겸손은 저열한 마음, 노예근성, 비굴함의 의미로 통용된 반면 유대교의 세계에서는 선한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유대교 세계에서는 그것은 진리, 사랑의 결속과 함께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되었다. 바울은 그 겸손의 덕목을 그리스도의 본질과 결부시켜 더더욱 격상시킨다. 또한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남의 일도 돌보라는 권면은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고전 13:5)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권면은 여전히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가깝지만, 빌립보 공동체 안에 있는 모종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공동체 안에 어떤 경쟁심 같은 것이 있었을 수 있고(4:2 참조), 전반적인 격려의 논조 가운데서도 그에 대해 분명히 경계하는 권면을 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통상 좋은 지도자와 회중 사이에서 권면은 오히려 특별히 귀담아 수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특별할 게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라면 일반적인 교훈이나 권면의 성격을 벗어나 모종의 사태를 적시하는 권면이 필요하다. 이 뒷부분의 권면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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