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삶과 죽음의 갈림길 - 요한복음 12:12~1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4-02 14:23
조회
1340
2023년 4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삶과 죽음의 갈림길
본문: 요한복음 12:12~19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 이후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에게 고난을 겪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어지는 한 주간은 그 고난을 새기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께서 본격적인 고난을 겪기에 앞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전해주는 본문말씀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 긴장감이 서려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마태 21:1~11; 마가 11:1~11; 누가 19:28~38)은 옛 예언자 스가랴의 예언이 마침내 이뤄졌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선포하였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스가 9:9)
그 예언처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 때 사람들은 ‘호산나’ 곧 ‘구하여 주십시오!’를 외치며 예수님을 반깁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은 환호하는 사람들의 대열을 지나다가 나귀를 발견하고 올라탄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메시지의 변함은 없지만, 미묘한 상황설정의 변화가 있고 그에 따라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가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반겼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서의 해당 본문말씀의 전반부에 나와 있는 상황 묘사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나귀는 미리 예비되어 있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다는 말에 다른 설명 없이도 사람들은 공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펼쳐 길에 까는가 하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환영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미 환영을 받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귀를 발견하면서 올라 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속마음과 그분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기대하는 것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동상이몽이라고 할까요? 긴장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 눈앞에 나타난 나귀를 탐으로써 당신이 바로 스가랴 예언자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의 몫을 맡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면 일종의 퍼포먼스와 같은데, 어떤 뜻을 지닐까요? 한 번 상상해보기 바랍니다. 어린 나귀를 탄 예수님의 모습에 어떤 위엄이 있었을까요? 그 모습은 결코 위엄과는 상관없습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소박한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먼 옛날 한 때 나귀가 지체 높은 사람들이 타는 짐승으로 간주된 적이 있습니다(사사 5:10; 10:4; 12:14; 삼하 19:26).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왕이 타는 짐승은 말로 바뀌고 나귀는 보통 사람들이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짐승으로서 몫을 하였습니다(열상 10:28; 예레 17:25; 잠언 21:31). 나귀는 그 어떤 권위를 나타내거나 또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거드는 몫을 담당하는 짐승이었을 뿐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진정한 구원자를 상징합니다. 그 구원자는 결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힘으로 세계를 호령하고 지배하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구원을 열망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존재, 그들의 필요와 희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존재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분입니다. 이 모습을 예언한 스가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스가 9:10)
평화를 말하지만 사실상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는 이들은 더 많은 병거와 더 많은 군마와 더 많은 활을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병거와 군마와 활은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절망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시고 사람들의 일상의 삶 한복판에 오시는 구원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온갖 허황된 환상으로 사람들을 기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그 소망을 이루어주시고자 할 뿐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함께 하시려고 할 뿐입니다.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체감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구원을 맛보는 삶이요 천국을 사는 삶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호산나!” 외치며 환영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접이요 동시에 그 누구에 의해서도 짓밟히거나 뭉개질 수 없는 우리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긍정입니다. 그 누구를 부정하거나 배제해야만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삶을 거부하고, 모두를 감싸 안고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각자 존재의 소중함을 실감하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환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보는 바로 그 뜻을 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요한복음은 여전히 예수님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은 긴장이 있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을 말한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16절). 영광을 받으신 이후, 그러니까 죽음을 딛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그 예언의 의미를 알았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를 해명하는 데 요한복음의 특이한 관점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죽음에 이른 나사로를 구원한 사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서, 죽음과 다름없는 삶에 매여 있는 자신들 또한 되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를 반기며 환호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여기에서 본문말씀이 전하는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이 이야기는 기존의 질서를 따르며 일반 민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뱉는 탄식입니다.
이 대비는 사실 본문말씀 바로 앞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가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크게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를 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를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 사람이 떨어져 나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12:9~12)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제사장들, 그리고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았지만 자신들이 그 시대를 이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탄식하였습니다. 결국 낡은 질서와 세계관을 대변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예수의 삶,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예수께서 죽음에 이르게 된 구체적 계기가 성전정화 사건이었다고 보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그런 극적인 계기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성전정화 사건을 예수님의 공적 생애의 지향으로 드러내는 사건으로서 생애 초반에 일어난 사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성전정화 같은 사건을 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고난을 겪고 죽음에 이른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 그 자체를 극적인 사건으로 조명한 셈입니다. 이 사건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의 대비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는 관건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와 대립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의 성격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부와 권력에 흥미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마땅한 삶, 인간으로서 삶을 소중히 여기고 어떻게 하면 그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애쓰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사랑을 이루는 삶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택한 길은 바로 그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지향하는 가치관으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새기는 한 주간, 우리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분명히 깨닫고 결단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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