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온전한 공동체의 길 - 베드로전서 5:1~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4-23 17:37
조회
1546
2023년 4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온전한 공동체의 길
본문: 베드로전서 5:1~4



베드로전서는 이른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로마사회에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그리스도교의 근본 도리가 무엇이며 그 근본도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 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그 요지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지배적인 사회질서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관이 긴장하고 있는 정황 가운데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베드로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뜻을 이어받은 교회 지도자의 서신으로, 그 연대는 대략 95년경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말씀에 그 저자가 누구일지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저자는 스스로 ‘장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의 시대가 지나고 교회가 점차 조직화되면서 장로라는 직분이 통용되고 있는 시절을 반영합니다. 본문말씀은 여러 장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장로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말씀인즉슨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는 권면이지만, 그 지도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지도자의 몫을 일깨워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구성원 모두가 함께 감당하여야 할 몫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서 앞으로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같은 처지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공동체와 그 지도자를 양떼와 목자로 비유하는 방식은 성서에서 아주 익숙합니다. 이것은 목자의 역할이 온전히 양떼를 먹이고 보호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그 이상 확대 비약하여 해석하는 것은 자칫 비유의 초점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적 표현을 통해 지도자에게 맡겨진 사명은 공동체의 온전성을 형성해가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몫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본문말씀은 세 가지로 그 방법을 일깨웁니다. 부정적 상황에 대한 대비를 통해 긍정적 태도를 환기하는 방식입니다. 베드로전서가 당대 지배적인 사회 질서와 갈등을 겪는 교회 공동체의 올바른 지향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세 가지 교훈은 당대의 지배적인 질서 안에서의 가치관과 곧바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로가 선출직으로 그 재임기간이 상당히 길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역할을 맡는 것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온전히 부여받은 직책으로서 위임받은 바 그 뜻대로 성실히 몫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여받은 뜻을 온전히 받들 때 권위는 부여됩니다. 권력을 장악해서 권위를 얻는 것이 아니라 위임해 준 뜻을 온전히 받들 때 권위는 부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라’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맹목적인 순종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뜻을 따르는 것과 스스로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습니다. 내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강요된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위하라.” 근대 철학자 칸트의 정언명령이 함축하는 바와 같습니다.

둘째로 “더러운 이익을 탐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받기 쉬운 경제적 유혹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더러운 이익, 부정한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서신에서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교훈입니다(디전 3:8, 디도 1:7 등). 이것은 일반적인 교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회 지도자의 직책상 우려되는 사태에 대한 교훈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재산과 재정을 관리하며 이를 오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하여 어떤 몫을 감당하기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마땅히 해야 할 몫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매우 자명하고 타당한 교훈이라 여겨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러운 이익, 부정한 이익이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취하는 이익을 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한 대가로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취함으로써 맺고 있는 관계 자체를 손상할 수 있는 이익을 뜻합니다. 필요의 충족이 아니라 그 이익을 취함으로써 배타적으로 우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면 그 역시 정당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돈과 경제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오늘 자본주의 시대에 이 교훈은 더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로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양떼에 대한 지배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도자의 몫은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권위는 요구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몫을 감당할 때 저절로 부여되는 것이라는 진실을 다시 환기해 줍니다.
이미 앞서 말했지만, 이 대목에서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당대의 지배적인 세계질서와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지도자에게는 막대한 권한이 부여되고 이끄는 무리들을 확실히 지배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래야 질서가 일서분란하게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력의 속성입니다. 권력은 누군가를 복종시키게 만드는 힘입니다. 교회는 그 권력의 속성을 철저하게 혐오합니다. 권력의 논리가 아니라 섬김의 논리를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초기 교회가 세상과 불화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그저 일반적인 교훈으로 흘려듣지 말기를 바랍니다. 본문말씀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해줄 뿐 아니라 오늘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과 그 풍토를 철저하게 되돌아보게 해 줍니다.
오늘 세계가 어떻게 그 질서를 유지하며 돌아가고 있는지는 우리가 익히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철저하게 자본과 권력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교회 역시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과연 오늘의 세계에 대한 대안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오히려 철저하게 자본과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계 안에서 생존하는 법칙을 가르치고, 그 교의로 무장하는 훈련기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문제시되는 종파들의 상식을 벗어난 일탈을 보며 깜짝 놀랍니다. 신천지나 JMS... 등등 그 지도자들에게 어떤 영험한 능력이 있어 보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사람들이 그에 현혹될까요? 어떤 지도자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그 지도자가 이끄는 집단 안에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 하는 기대 심리 때문입니다. 삶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생각하기보다 누군가 위대한 사람이 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성찰 능력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기성교회의 논리와 습성을 그대로 닮았다는 것입니다. 문제시되는 종파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 안에서 배태되었습니다. 그것이 일부 사람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욕구와 의존심리를 더욱 절묘하게 활용하는 전략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렇게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더 근본원인이기는 합니다.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을 헤치고 나가 대안을 찾기보다는 환상적 기대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병리현상에 빠지게 하는 환경이 문제입니다. 그에 편승하는 교회가 문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신앙심으로 정당화하는 교회가 문제입니다.
그러니 국민을 지배하는 통치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불편하게 여기고 오히려 협력하는 것을 교회의 본분으로 여기는 이상한 신앙이 용인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실은 스스로를 그대로 빼어 닮은 신흥종파에 대한 대응에도 무력하고 심지어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대목에서는 서로 협력하기까지 합니다. 전광훈과 신천지, 아니 한국교회가 어디에서 힘을 함께 모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자진해서 기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 모이니까 그것을 즐기며 그렇게 모이는 데 힘을 쏟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말씀은 엄존하는 지배적 세계를 가만 두고 그 질서 안에서 순응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는 가치관을 문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이라면 그와는 명백히 다른 삶을 살라고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저자는 스스로 겸손하게, 똑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진솔하게 권합니다.
오늘 말씀의 권면을 그저 지도자의 문제로 돌려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떤 공동체가 어떤 지도자를 만들어내는지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지배하는 권위적 지도력이냐 섬기는 본을 보여주는 겸손한 지도력이냐 하는 것은 공동체 성원의 기대에도 달려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만일 전지전능한 지도력이 요구된다면, 모든 문제를 일사분란하게 일거에 해결할 능력이 요구된다면, 심각한 시험에 빠지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요구가 괴물 지도력을 만듭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능력을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결여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소통하는 가운데 서로를 보완하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모든 것을 내버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당신을 완전히 비워버림으로써 비로소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의 요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그 믿음 안에서 권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매여 생각 없이 살지 않고,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에 애쓰고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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