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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 시대에서 욥은 누구인가? - 정혁현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09-11-29 23:54
조회
3891
* <기독교사상> 2009년 12월호 서평


우리 시대에서 욥은 누구인가? : 최형묵 목사의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을 보고


                                                                정혁현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이라 하면 대개 잠언과 전도서 또는 시편을 떠올린다. 물론 『욥기』도 지혜문학에 포함되지만 대중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전도서나 잠언은 솔로몬, 즉 성서의 인물 중 가장 지혜로울 뿐 아니라 가장 큰 영화를 누린 인물이 쓴 문서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도서의 저자, 즉 ‘전도자’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전도서와 잠언은 이른바 ‘성공한 사람’의 인생관과 처세술이다. 적어도 솔로몬의 영화를 욕망하는 성공시대의 독자들은 이 지혜서들을 그렇게 읽는다. 그러므로 지혜서들은 요즘 서점에 가면 소위 ‘실용서’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 대개 성공에 따른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실패자들에게 너그럽게 충고 한 마디 하는 책들의 반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성공’이라고 알려진 삶을 간절히 욕망하는 독자들은 그런 책들을 읽으며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찾아내고 다시금 성공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곤 한다.


대체로 그런 책들은 성공한 자가 자신의 삶을 성공 이후의 시점에서 ‘사후적으로’ 돌아보며 정당화하는 형식을 가진다. 이런 식으로 보면 과거의 선택은 대부분 성공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현존하는 질서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조건이었을 뿐 결코 변화시켜야 할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적 양극화가 점점 더 극심해지는 요즈음의 상황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현상을 보면 씁쓸하다. 성공의 문은 좁아지며 남루한 삶은 늘어만 가는 현실에서 이런 실용서들이 실패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패한 이들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성공한 소수의 영광을 더욱 더 빛내는 주제넘은 봉사활동만 하고 마는 격이 되는 것이다.


파이를 나눌 생각을 하지 말고 키울 생각을 하라는 신자유주의의 지혜는 가진 자, 성공한 사람에게 실패하고 가난한 사람의 몫까지 몰아주라는 말에 다름 아님이 밝혀졌다. 더욱이 글로벌 금융위기는 커진 것처럼 보이던 파이가 실상은 불면 꺼지는 투기 거품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이라면 허황된 성공신화에서 깨어나 비록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맡은 바 직무를 기쁘고 성실하게 수행하며 소박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대다수 찌질이들의 삶을 재평가하고, 이들의 생활을 지속가능하며 발전 가능한 궤도에 올려놓는 일이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여전히 성공신화가 정치권력까지 틀어쥐고 양극화를 극단까지 몰아붙이는 굿판으로 난리법석이다. 성공한 자, 가진 자들이야 이런 현실이 그 자체로 잔치 마당일 터이지만, 대체 실패한 이들은 왜 남의 잔치에서 춤을 추는 것인가? 문제는 맘몬에 현혹된 정신이다.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참 지혜의 모범을 『욥기』에서 찾고자 한다. 그런데 『욥기』는 결코 쉽게 읽히는 문서가 아니다. 『욥기』는 구약성서 지혜전승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혜전승 중의 다른 문서들, 예를 들어 전도서나 잠언 등은 딱히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읽어보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내용들이다. 그런대 『욥기』는 그렇지가 않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내용은 대개 욥을 비난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뿐이다. 더욱이 친구들이 욥의 회개를 촉구하며 던진 이런 발언들은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어리석다”(42:8)는 핀잔을 듣는다. 반면 주인공 욥의 발언들은 감히 입에 올리기도 불경스러운 경우가 많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6:4)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7:16) 심지어 하느님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주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10:3) 도저히 의로운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들이다. 사정이 이러니 상식적인 수준에서 『욥기』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이내 혼란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대체 『욥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저자 최형묵 목사에게 『욥기』는 성공한 자들의 지혜가 아니라 실패한 자들의 지혜이다. 욥이야말로 한 순간에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배척되었으며, 심지어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자신의 육체로부터도 괴롭힘을 당하는 찌질이 중에서도 상 찌질이로 전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대 저자에게 욥은 성공한 사람들을 선망하면서, 그들의 충고에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욥의 정체는 “도발과 항변”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과 항변이야 말로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과의 대면,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희망의 언어”이다.  


『욥기』는 지혜문학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 때문에 구약신학은 물론이요, 신학 전반을 넘어 철학과 문학 분야에서 방대한 연구와 해석이 축적되어 있는 문서이다. 이 모든 자료들의 성격을 함부로 싸잡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욥기』에 대한 관심은 대개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신학적 주제에 집중되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면 왜 이 세계에 악과 불의가 존재하는가?” 이러한 신정론의 질문은 자비로운 하느님의 통치를 믿는 기독교 신앙을 궁지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악과 불의가 현존하는 것은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 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며. 결국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욥기』에 관한 신학적 연구는 대개 이러한 궁지를 돌파하여 ‘전능한’ 동시에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신 개념을 수호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노력은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논리를 돌파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신도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고도의 추상적이며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최형묵 목사의 책 역시 신정론의 문제의식 안에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욥기』가 지혜문학 중에서도 독특한 문서인 것은 사실이지만, 욥이 처하게 된 상황, 즉 의로운 사람이 고통에 빠지는 삶의 상황은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것임에 착안한다. 그 이유는 신정론이 제기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삶의 현실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최형묵 목사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의 문제에 애써 눈감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온몸으로 저항하고 항변하는 욥 같은 인물에게서 기독교 신앙인의 한 모범을 본다. 따라서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전능한’ 동시에 ‘자비로운’ 하느님 개념을 수호하는 일에 조금도 애쓰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욥기』 안에서도 이러한 신학적 개념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모두 욥을 비난하는 그의 친구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욥기』 안에서도 하느님의 핀잔을 듣는다.


반면 저자의 관심은 어떻게 이처럼 부조리로 꽉 막힌 현실에서도 결코 저항과 항변을 포기하지 않는 욥의 태도가 어떻게 기대할 수 없었던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내는가에 집중된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신 욥의 신앙은 주어진 현실 자체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현실에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음을 통탄하고 이를 저항과 항변을 통해서 구현하고자하는 불굴의 정신이다. 아마도 이러한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창조세계의 청지기 정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신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그 연구 대상인 『욥기』와 동일한 관심사와 방법을 가진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함부로 『욥기』를 요약 정리하여 그 핵심을 추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욥기』의 서술을 따라가면서 이 구약성서의 독특한 지혜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 시대의 상황이라는 증폭기를 통해 말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욥기』를 우리 시대라는 맥락에서 다시 쓴 2009년 판 『욥기』, 혹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시대의 『욥기』라 할 수 있다. 연구가 연구 대상과 동일한 시야를 확보했기 때문에 분출되는 생산성은 다양하지만, 이 책의 경우 두드러지는 것은 여느 『욥기』 연구서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동시대적 울림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반전의 희망”은 결코 주어진 현실에서 찌질이가 결국 ‘운 좋게’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는 성공신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전은 욥의 저항과 항변이 초래한 현실 그 자체의 뒤집힘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 신앙의 ‘회개’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회개는 단순히 신앙인이 주어진 현실 내부에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뒤집히는 사건, 지혜로운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고, 높고 거룩했던 것들이 천하고 하찮아 보이는 세계 그 자체의 뒤집힘이 아닌가?


기독교인의 성서 읽기는 대체로 자기 확신의 재확인에 그치는 수가 많다. 이 때 성서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거울처럼 사용하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며 이를 하나님으로 착각한다. 이를 나르시스의 성서읽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때 우리의 “아멘”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이런 성서 읽기는 폭 넓은 성서이해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씀, 듣기 좋은 말씀만 반복적으로 읽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성서를 이런 식으로 읽는 신앙인들에게 『욥기』는 불편한 책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식당개업식 문구가 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욥기』 안에서 결국 하나님의 핀잔을 듣는 발언을 마치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웃지 못 할 오해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성서를 읽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침묵시키고 나의 욕망이 원하는 발언을 하나님에게서 강탈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조심하려 하지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훈련이 충분하지 않아 성서 읽기를 매우 어려워하는 신앙인들 또한 적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최형묵 목사의 책은 하나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 책은 현직 목회자로 천안살림교회를 담임하는 저자가 교인들과 함께 『욥기』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초보적인 신앙인의 수준에서 『욥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욥기』를 통해 신앙인이 들어야 할 말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의 탄탄한 민중신학적 입장과 목회적 경험을 버무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고도 명확하게 표현해내는 깔끔한 문체 덕분일 것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에 살면서도 창조질서를 거슬러 맘몬의 질서를 강요하는 배반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창조질서는 인내의 임계점에 서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위기를 깊이 자각하는 신앙인들조차 어디에서부터 출구를 찾아야하는지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희망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절망의 장벽 앞에 선 인간이 세계와 함께 파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 최형묵 목사는 『욥기』를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신실한 신앙인의 씨름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세계에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신앙적인 삶의 구체적인 의미를 묻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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