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민중의 노래, 부활의 노래 - 사무엘상 2:1~10[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4-01 16:29
조회
10371
2018년 4월 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민중의 노래, 부활의 노래
본문: 사무엘상 2:1~10




예수께서 죽음을 딛고 일어선 부활의 아침입니다. 죽임의 힘이 세상을 짖누르고 있지만, 결코 그 죽임의 힘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찬미하는 아침입니다.

그 부활의 아침에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함께 읽었습니다. 부활사건을 전하는 여러 본문말씀들이 있지만, 언뜻 보기에 그 사건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 기도가 대체 부활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이자 노래인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의 원형이 되는, 아주 오랜 송가입니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한 개인의 기도요 송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단지 한 개인의 염원이 아닌, 아주 오랜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났을 때 그 어머니가 불렀던 노래로 전해지고 있는 이 노래는, 예수님이 잉태되었을 때 그 어머니 마리아가 부른 노래와 그 내용에서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아주 질긴 생명력을 가진 민중들의 염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무엘이 부여받았던 기대, 예수님이 부여받았던 기대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며, 그 기대가 끊임없는 민중들의 희망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이 본문말씀의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사시대 말기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는 엘가나라는 사람이 산간지방 라마다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이 한나요 또 한 사람이 브닌나였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특별히 자식이 없는 한나를 챙겼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는 브닌나와 그 자녀들에게는 제물을 한 몫씩 챙겨주었다면 한나에게는 두 몫씩 챙겨주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위로를 받지 못하는 한나에게 엘가나는 정말 온 정성으로 대했습니다.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그렇게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고대사회에서 여인에게 자식, 그것도 아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물론 아들로 이어지는 상속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런 주제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그 만큼 절실한 문제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게다가 다른 부인은 여러 자녀들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자녀들이 없었을 때 어땠을까요? 한나는 간절히 기도했고, 그 결과 기도의 응답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품안에 사무엘을 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말씀은 그 기쁨을 하나님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대개 소원이 이뤄지면 곧바로 성소에 가 하나님께 감사의 의식을 치르는데, 한나는 어린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집에서 함께 하다가 마침내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사무엘을 바치며 기뻐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부른 노래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먼저 이 노래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기쁨으로 주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가로막은 원수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원수들이란 꼭 인격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바라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어떤 장애물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이 내용을 잘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을 가지지 못한 여인으로서 한나의 처지를 반영하는 내용은 딱 한 구절뿐입니다. 그 밖의 모든 내용은, 항상 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려 좌절해야 했던, 약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마침내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가 단지 개인의 노래가 아니라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노래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 기도, 이 노래의 결말은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마침내 악인들 가운데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것을 염원합니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놓으셨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주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갖고 있다면 여기서 의아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왕이 없던 시절이요, 더욱이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일을 극구 반대했던 인물인데, 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실현하는 왕을 말하는 것이지만, 아직 사무엘의 시대에는 그런 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에게 기대되었던 희망이 왕이 존재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무엘 당대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된 성서는 민중들 가운데 지속된 그 희망을 그렇게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원사건에서 비롯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곧 이스라엘 민중의 염원은 끊임없이 역사를 관통하는 희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200여 년 동안 왕이 없이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끝자락에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사무엘이 그 자유민 공동체의 마지막 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강력한 왕권체제를 바랐습니다. 성서는 애초 그 사실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배신행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극구 반대하지만, 마지못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써 민중의 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왕권체제가 형성되고 난 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왕권체제가 형성되어 경제발전의 논리가 지배하고 정치권력이 강화되는 현상이 현저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백성 가운데 구현되어야 할 평등의 이상, 정의의 이상을 외쳤습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이념의 대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희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이 성서의 기저를 이뤘고, 그 희망이 더더욱 가혹한 죽음의 시대를 경유하고 난 다음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 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에게 이어진 성서의 중심 기저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봉착하는 불가능의 현실에서도 그 불가능의 장벽을 넘어서 누구나 진정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희망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이렇게 급변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전쟁위기로 치닫는 위기 상황이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진정되는 것만으로도 안도하고 위안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 이상을 넘었을까요? 아직 사태의 귀결 향방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그 이상의 기대를 가지는 것이 결코 무모한 환상이 아니라 할 만큼 급진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된 상황에 북중 정상회담이 이뤄진 것을 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반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화를 향한 여정이 가시권 안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확립이 결코 멀지 않은 미래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의 반전, 그것이 곧 부활사건입니다. 죽임의 갈등과 전쟁에서 삶의 평화로의 반전, 그것이 곧 부활입니다.
바로 그 희망찬 반전이 이뤄지고 있는 이 즈음 또 하나의 부활사건에 주목합니다. ‘제주4.3’입니다. ‘4.3항쟁’이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그 이름을 붙이지 못해 그렇게 부릅니다. 내일 모레(4/3)이면 70주년을 맞이합니다.
‘제주4.3’은 해방이후 일그러진 우리 현대사 속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사건 가운데 최대규모의 사건으로서, 정부의 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자만도 약 15,000명에 이르는 참혹한 반생명ㆍ반인권의 사건입니다. 당시 희생자 수는 실제로 25,000~3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 규모는 당시 제주 인구 27만 명 가운데 10%를 넘어섭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해방직후 제주도의 특수한 상황, 그리고 미군정 주도하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시도가 그 배경이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 일본군은 제주도에 6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켜 전략적 기지로 삼았는데, 패전 후 그 군대가 철수하였고 대신에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도 출신 6만여 명이 귀환하면서 제주도에는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습니다. 해방직후 불안한 상황과 소요사태는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급격한 인구변동과 동시에 실직난, 생필품 부족, 흉년 등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친 제주도에서의 불안정한 상황은 심각하였고, 그 분위기 가운데서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이 악화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펼쳐졌고, 결국 1948년 4월 3일 제주도민은 자구적 차원에서 본격적인 항쟁을 벌이면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 미군정은 군경을 동원해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고, 그로부터 1954년 9월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무려 7년여 동안 비극적인 사태는 지속되었습니다.
이 사태는 단순히 한국의 고립된 한 섬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지을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 막 시작된 냉전체제의 비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2차 대전 이후 미군의 지휘 아래 자행된 동아시아 민중학살의 ‘원점’이요, ‘원형’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공포하여,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2003년에는 대통령이 나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절차였으며, 어떠한 경우라도 무고한 생명이 권력에 의해 희생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천명이었습니다.
3주 전 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4.3평화기행단 대표 자격으로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비극의 현장을 둘러보고 생존자의 증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70년 전 그 사건의 목격자로서 막내둥이에 해당하는 증언자는 “살면 살아지더라”고 했지만, “요즘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70년 동안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야 제대로 그 진실을 증언하게 되어 좋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요?
체제와 이념의 대결이 낳은 참극을 낡은 시대의 유물로 돌리고 진정한 평화를 이룰 때, 한라에서 백두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평화의 바람이 몰아칠 때, 그 가운데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정겨운 살붙이와 이웃들, 그들과 더불어 사소한 일상의 삶을 기쁨으로 만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치유가 이뤄질 것입니다.
오늘 한라에서 백두, 백두에서 한라로 이어지는 평화의 바람은 비로소 그 치유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땅의 부활, 체제와 이념의 대결 때문에 낙인찍히고 숨죽이며 죽은 듯이 살아야 했던 이 땅의 민중의 부활 사건입니다. 촛불항쟁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이 가능했을까요?

부활사건은 거대한 화산맥과 같이 분출하는 일련의 사건입니다. 그 일련의 사건은 결국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역사의 부활은 곧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부활로 체험될 때 비로소 진정한 부활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2천 년 전 한 분이 죽음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진실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이 그 죽음을 딛고 일어나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선취요 표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 그 진실을 새기며 우리들 모두가 진정한 부활사건의 증언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부활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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