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 빌립보 2:1~11[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7-15 16:44
조회
13765
2018년 7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본문: 빌립보 2:1~11



신학자요 동시에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한결같이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열정에서 비롯됩니다. 빌립보서 역시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합니다. 예컨대 3장의 서두를 보면 매우 심한 말로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는 전반적으로, 진정으로 위로를 받는 삶이 무엇인지, 기쁨을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 금방 느낄 수 있는 어조로 일관합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갈라디아서 같은 책이 마치 ‘날선 검’과 같은 책이라면 빌립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한 ‘위로의 손길’과도 같은 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한 예리한 신학자로서 면모를 갖고 있음과 동시에 교회 구성원들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목회자로서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빌립보서는 그 목회자로서 바울의 진면목을 잘 읽어낼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우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렇게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펼친 것은 그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최초 유럽 선교의 열매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 지역으로 선교를 나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환상을 보며 한 외침을 듣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결국 바울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유럽 쪽으로 건너가 빌립보에 이릅니다. 바울이 본 환상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의 어떤 절박함을 뜻할 것입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왕의 아버지 필립2세에 의해 합병된 도시로서, 주전 147년 마케도니아가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이 도시는 주전 89~84년 1차 미트리다스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고, 주전 42년 시저의 암살자인 부르투스와 카시우스 그리고 시저파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참혹한 전쟁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전 30년경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식민지로서 이름을 얻게 되었고 로마 퇴역군인들에 의한 식민이 지속되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의 격전지가 됨으로써 그 도시 사람들의 삶, 특히 정신적 상황은 황폐화되어 있었습니다. 불안정한 그 도시의 상황은 광범위한 종교혼합주의에서도 드러났습니다. 토착적인 신들과,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그리고 소아시아의 신들이 뒤엉켜 있는 도시풍경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곁에 번듯한 회당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미약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머물면서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강가를 찾아갔습니다. 회당이 아니라 강가에 있는 기도처였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에 번듯한 유대인 회당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처소가 있다는 것은 소수의 무리이지만 유대인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강가의 기도처에서 바울은 모여 든 여자들을 만납니다. 통상 유대인들의 모임은 남자가 10명 정도 모여야 정식 예배가 이뤄졌습니다. 따라서 강가 기도처의 모임은 정식 예배가 아니라 여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정도의 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어 처음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습니다. 작은 공동체의 한 성원이었지만, 루디아라는 여인은 빌립보교회의 중심인물인 동시에 사도 바울의 선교를 돕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흔히 바울의 선교활동을 생각할 때 스스로 천막을 만들어 팔며 자금을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펼친 소위 ‘자비량 선교’의 모습만 연상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뒷받침해주는 교회들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미약한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빌립보교회는 바울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파하던 초기에,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 받은 일로 나에게 협력한 교회는 여러분들밖에 없습니다.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내가 쓸 것을 여러 번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이롭게 될 풍성한 열매를 구하는 것입니다.”(4:15~17)
빌립보에서 바울은 그다지 그 긴 시간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귀신 들린 여인을 치료한 일 때문에 그곳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잠시 머물렀지만,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선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사랑’이라고 할까요? 유럽선교의 첫 열매이지만, 미약한 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서서 각별하게 뒷받침을 해준 빌립보교회이기에 아무래도 그 교우들에게 전하는 서신의 내용이 더욱 각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지금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제자 디도를 통해 절절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서두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빌립보서 내용 가운데서 본문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교회 안에 나타난 어떤 문제의 상황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권면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본문말씀은 먼저 다소간 분쟁과 불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빌립보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로 그 문제부터 지적하며, 진정으로 하나 될 것을 권면하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머리를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1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사랑의 위로, 영의 교제, 자비와 동정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지향점을 일깨우는 것을 말하고, 사랑의 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과 상통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친밀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영의 교제, 그리고 자비와 동정은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입니다.
이 물음으로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물음들은 새삼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이미 경험한 사실들일 것입니다. 마치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심정으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새삼 환기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힘을 얻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로를 받는지,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고 있는지, 그리고 서로 자비를 베풀며 동정을 아끼지 않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해당한다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밝은 권면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권면(2절)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이 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같은 생각’은 바울이 올바른 인간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로서(1:7; 롬 12:3,16; 15:5), 이어지는 말들은 같은 의미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의의를 지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권면(3절 이하)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툼(저열한 마음, 시기심)이나 허영(자기과시, 자랑)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겸손을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리스적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만의 고유한 가치전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치전도는 겸손에 대한 그리스 세계와 유대교적 세계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적 세계에서 겸손은 저열한 마음, 노예근성, 비굴함의 의미로 통용된 반면 유대교의 세계에서는 선한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유대교 세계에서는 겸손은 진리, 사랑의 결속과 함께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겸손의 덕목을 그리스도의 본질과 결부시켜 더더욱 격상시킵니다. 또한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남의 일도 돌보라는 권면은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고전 13:5)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권면은 여전히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가깝지만, 빌립보 공동체 안에 있는 모종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어떤 경쟁심 같은 것이 있었을 수 있고(4:2 참조), 전반적인 격려의 논조 가운데서도 그에 대해 분명히 경계하는 권면을 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통상 좋은 지도자와 회중 사이에서 권면은 특별할 게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바로 오늘 우리 교회에서 지금 이 말씀의 선포도 그렇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라면 일반적인 교훈이나 권면의 성격을 벗어나 모종의 사태를 적시하는 권면이 필요합니다. 분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권면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권면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태도, 특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의 수평적인 유대와 일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 유대와 일치를 구체적인 태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본문말씀을 대할 때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가운데 그 권면이 주는 의미를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격려 어린 권면은 ‘그리스도의 찬가’로 직결됩니다. ‘그리스도의 찬가’는 초대교회 당시 널리 받아들여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어떤 근거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그 근거를 밝혀 주는 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내 놓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마음을 우리더러 품으라는 이야기는 윤리적 권면 이상을 의미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든지, 겸손하라든지 하는 식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윤리적 덕목으로 구체화해서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이 말씀은 그 이상의 근본적인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가치를 전환하라는 이야기이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삶, 하나님과 일치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이 거듭난 삶의 경지를 말합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 경지에 이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말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 9절 이하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이 사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이제 거꾸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찬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철저하게 자기를 비울 때 거꾸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에서 죽었던 나는 되살아납니다. 그러나 되살아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삶을 누리는 ‘나’입니다.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얻는 나입니다. 결국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버렸지만, 이제 거꾸로 나의 모든 것을 인정받고 나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경지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자기부정과 고통만을 동반한다고 보는 것은 일면의 진실일 뿐입니다. 신앙의 궁극적 경지는 나 자신과 삶에 대한 진정한 긍정과 기쁨입니다. 부정과 긍정의 역설적인 통합의 경지, 그것이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닮는 경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백성의 해방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로 세상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시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그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궁지로 몰아넣고 생명을 빼앗는 악순환을 거부하는 길입니다. 그 길로 모든 사람이 영광을 누리고,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 길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매일 일상사의 걱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이 그 길을 따르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서신의 말미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4:11~13)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사람은 궁핍함을 겪거나 고통을 겪을 때 한없이 가라앉습니다. 거꾸로 부유함을 누리고 배가 부를 때면 한없이 기고만장해집니다. 작은 차를 타고 달리면 자기 몸도 작아진 느낌이 들고 큰 차를 타고 달리면 자기 몸도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큰 차나 작은 차나 길거리에서 모두 달리는 차로서 똑같은 한몫을 하고 있을 뿐이고, 또한 동시에 모두 다 내 몸을 옮겨 주는 교통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어떤 경우에나 모두 그에 맞게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지금 당장 주어진 조건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는 상대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진실을 깨닫습니다. 지금 자기를 자기 되게 하는 것은 지금 처해 있는 조건이 아니라,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바로 그것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근거이며, 그것이 바로 어떠한 경우에나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근거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진실을 마음에 새김으로 어떠한 경우에나 진정한 위로를 누리고 새 힘을 얻어 내 곁의 자매형제와 더불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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