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지금 이 시간, 우리는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 마태복음 11:2~6; 16:1~4[정용택 목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9-11-10 19:51
조회
90873
2019년 11월 10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지금 이 시간, 우리는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본문: 마태복음 11:2~6; 16:1~4
정용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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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시켜서, 3 예수께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표준새번역]

16:1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3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 [표준새번역]

Ⅰ. 공부하는 교회를 지향하다

우리 교회는 지난 주일 공동의회에서 창립 20주년에 즈음하여 담임목사님이 수정하신 천안살림교회지표 개정초안을 검토한 바 있습니다. 제가 지금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이라 그런지 제게는 초안 가운데서도 특히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공부하는 교회: 참된 신앙은 끊임없는 진리탐구의 과정을 동반합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 또한 그 말씀이 구현되어야 할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타공인 ‘공부하는 교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담임목사님부터 일단 민중신학자이자 기독교사회윤리학자로 활동 중이시고, 지금도 교회에서 다양한 강좌와 공부모임들이 진행 중이며, 심지어 예배당 이름조차도 ‘나눔과 배움의 터’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교회는 창립 이래 2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이 시간까지 늘 ‘공부하는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연구단체에서 몸담고 공부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런 우리 교회가 정말 좋습니다. 오늘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지금 이 시간, 그러니까 교회 창립 20주년에 즈음한 이 시점에서, 우리 천안살림교회는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교회지표 개정초안에 나와 있듯이,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이상 우리가 함께 공부해야 할 것은 복음의 진리일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성서를 열심히 읽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좋은 신학 서적들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 원리적으로 적용되고 사건으로 실현될 이 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정보를 많이 습득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는 복음의 본질과 관련하여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나아가 우리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인 관계가 오늘날 이 세계에선 어떤 새로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를 묻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계의 상황, 즉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사회구조나 권력형세의 동학이 어떠하기에, 계급적‧세대적‧젠더적‧지역적‧종족적‧종교적‧이념적 차원에서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인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개개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인 고통과 위기는 이러한 세계의 상황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세계를 둘러싼 문제적 조건들이 복음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우리의 삶을 또 어떻게 얼마나 규정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지금 이 시간,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누구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런 우리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시대, 우리들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Ⅱ. 시대의 징조들을 분별하라!

오늘 읽은 두 본문 역시 자신들이 살았던 세계에 관해 의문을 품고, 예수에게로 다가왔던 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읽은 마태복음 11장의 본문은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에게 질문했던 세례 요한이 등장하며, 뒤에 읽은 마태복음 16장의 본문은 예수에게 적대적이었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예수를 찾아와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뒤에 읽은 마태복음 16장 본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는 제자들과 배를 타고 마가단 또는 막달라, 막달란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때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배계급으로서 산헤드린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공의회의 요직을 함께 차지하고 있는 그런 종파들이자 정치적 분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해석이나 신학적 교리뿐만 아니라 대(對)로마제국과 관련된 정치적 입장에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며 대립하는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날마다 싸우고 있는 집권여당과 제1야당의 관계와 비슷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이 참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가복음의 평행본문(막 8:11-12)에선 바리새인들만 등장하고, 마태복음 내에서 유사한 본문인 마태복음 12:38에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선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예수를 찾아온 것으로 묘사합니다.

마가복음 8: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와서는,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다. 12 예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2:38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 보았으면 합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평소에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집단일지라도, 공동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안에선, 특히 자신들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스라엘 사회 전체의 안녕을 위협할 제3의 세력이 출현했다고 느껴질 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어 ‘대연정’을 이룩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일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노동문제나 재벌개혁, 성소수자 인권 문제 등에 관해선 여당과 야당이 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마태복음의 관점에선 지역사회의 권력자들인 바리새파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중심부 권력자들인 사두개파에게도 위협이 될 만큼, 예수는 그 사회의 지배계급 전체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성전과 회당 밖에서 차별받고 배제 당하던 오클로스/민중들에게 구원을 선언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교리적으로 바리새파의 입장과 강하게 충돌했고, 다윗의 후손을 자처하며 대중들을 몰고 다니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동하던 그의 메시아적 행동은 대제사장직을 독점하며 헤롯 왕가의 주구(走狗)로서 로마제국 식민지배체제에 복무했던 사두개인들에게 정치적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일시적으로 반(反)예수동맹을 이루어 예수를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의 불순한 의도와 목적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징’(징조; 표적; sign; σημεῖον),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표적’을 예수에게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신이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맞음을 입증할 증거를 내놓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예수께선 이미 앞서 수도 없이 많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그들은 예수의 메시아적 지위를 시종일관 부인해왔습니다. 그랬던 그들이기에 예수께서 그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살리는 것, 즉 복음을 성취하는 것,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단지 기적을 위한 기적,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능력을 시위하는 보여주기식 표적을 거부한 것입니다. 당장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어떤 놀라운 표적을 보여준다고 해도 어차피 그들은 마술사 같은 이들을 데려와서 똑같은 표적을 보인 후에 그 표적을 가지고서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 잔재주나 부리는 한낱 마술사에 불과하다고, 그가 일으킨 표적들은 다른 마술사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은 예수에게 질문을 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예수를 시험하여,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불순한 의도로 표적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과 유사한 정황을 반영하고 있는, 그러나 보다 축약된 형태로 기록된 마가복음 8장 12절 및 마태복음 12장 39절과 유사하게, 16장 4절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준엄한 책망과 경고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습니다. 표적을 요청하는 일 자체를 비난하는 정도를 넘어서, 그것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세대(generation; γενεά) 전체의 문제, 즉 시대정신 자체가 악하고 음란하게 병들어 버린 문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표적을 위한 표적’의 요구는 당대의 특유한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장 2-3절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예수님은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는데, 예수는 그들이 하늘의 상태를 보고 그날의 날씨를 예측할 줄은 알지만, 시대의 표징, 시대의 징조는 분별할 줄 모른다고 비난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말 그대로 땅과 대비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sky; οὐρανός)의 날씨를 분별하는 것이나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것이나, 눈앞에서 펼쳐지는 예수의 표적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즉 하느님에게 기원을 두고 있는 표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는 아무 관련 없는 문제입니다. 하늘을 보고 날씨를 예측하는 것, 시대의 징조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표적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 이 각각의 표징에 대한 인식은 범주가 전혀 다른 사안들이라는 것입니다. 날씨를 예측할 수 있는 자료로서 물리적인 하늘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입된 유대교적인 완곡어법으로서 ‘하늘’(heaven; οὐρανός), 둘이 아무리 같은 단어라도 의미상으로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그 둘과 관련된 표징 역시 다른 인식의 범주에 속합니다. 더욱이, 잠시 후 얘기하겠지만, ‘시대의 징조’라는 예수의 표현에 담긴 ‘시대’라는 말은 똑같이 ‘표징/표적/징조’(σημεῖον)와 결합하여 쓰였을지라도, 앞의 두 하늘과는 또 다른 신학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문맥상으로 2-3절은 적대자들이 예수에게 요구한 것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다소 이상한 답변인 셈입니다.

지금 혹시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온 표준새번역성경이나 새번역성경을 가진 분들이 계신가요? 1993년에 출판된 표준새번역성경이나 그 개정판으로 2003년에 나온 새번역성경에서는 마태복음 16장 2-3절이 대괄호 ‘〔 〕’로 표시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표시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대괄호 표시는 해당 본문이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어서 원본의 반영임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를 나타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6장 2-3절은 권위를 인정받는 다수의 고대 사본들에는 빠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아마도 후대에 누가복음 12장 54-56절에 근거하여 보충되었거나, 아니면 반대로 원문에는 들어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서 쓰여진 사본들에선 생략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집트와 같이 붉은 아침 하늘이 궂은 날씨를 나타내지 않는 지역의 필사자들이 자신들의 지역적 조건과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의도적으로 삭제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콥틱 교회의 배경이 된 이집트 지역에서 필사된 다수의 고대 사본들에서 2-3절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서 사본에 따라서 어떤 사본에는 2-3절이 들어 있고, 또 어떤 사본에는 안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로 학계와 교계에서 인정받는, 그리고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오는 모든 성경들도 번역의 대본으로 삼고 있는 『네스틀레-알란트 그리스어 신약성서』에선 이 구절을 대괄호 안에 넣어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아예 본문 밑에 주석을 달아서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괄호 안의 본문이 없음”이라고 표기해두었고, 새번역성경에서는 맨 앞에 일러두기에 대괄호의 용례를 일괄적으로 설명해놓고 있습니다. 16장 2-3절이 원문에 속하는데 후대에 어떤 곳에서 삭제된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원문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어떤 이들에 의해 추가된 구절인지, 그 명확한 진실을 지금으로선 완벽히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문의 반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저는 이 구절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구절의 추가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선 잠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Ⅲ.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들을 듣고 보라!

이제 오늘 먼저 읽은 마태복음 11장 2-6절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16장 본문에 비하면 이 본문은 그 해석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본들 간의 불일치 문제도 없습니다.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7:18-23절과도 거의 일치합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에서 세례 요한의 투옥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11장의 시점에도 그는 계속 수감 중이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예수가 일으킨 메시아적 사건들에 대한 소문을 접했지만, 여전히 예수가 정말 메시아인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의 이 질문에는 다양한 구약성서 본문들이 그 배후에 놓여 있는 것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이 표현이 특별한 메시아적 희망과 연관되어 있지 않고, 단지 마태복음 3장 11절에 나오듯이,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했을 때, 요한 자신의 뒤에 오실 그이가 맞는지를 묻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요한은 오실 그분이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인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질문의 요지는 단순 명확합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아입니까?” 요한의 질문은 그야말로 “말해 Yes or No!”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답변했나요? 메시아가 맞다 했습니까, 아니다 했습니까? 이번에도 예수님의 답변은 동문서답에 가깝습니다. 질문에 대한 즉답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Yes or No로 답하면 될 것을 쓸 데 없이 길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투머치토커가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내가 오실 그이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 16장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요한이 감히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그렇게 질문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정말로 궁금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한계를 무릅쓰고 예수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들려준 기적들과 복음의 선포가 요한에게 그 자체로 새롭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소문을 들어 이미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서, 그렇지만 좀 더 확실한 답을 예수 자신에게 직접 듣고 싶어서 그렇게 질문한 것이니까요. 추측이긴 하지만, 저는 예수께서 요한의 질문에 단순명료하게 Yes로 답했다면, 오히려 요한은 예수를 가짜라고 생각했을 것이라 봅니다. 이는 특히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메시아 비밀’이라는 신학적 논제와 관련된 사안입니다.

자, 이제 예수의 답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는 질문자들인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합니다.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듣고 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11장 2절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요한이 감옥에서 전해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이겠지만, 5절에서 예수 자신의 말씀으로 더욱 상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이는 예수에 의해 행해진 여섯 가지 유형의 특별한 표적들로서,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팔복을 비롯한 예수의 산상설교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할뿐만 아니라 8-9장에 묘사된 일련의 기적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를 예언했던 구약성서의 표현들과도 매우 일치합니다. 눈 먼 사람이 보는 것과 다리 저는 사람이 걷는 것과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는 것과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유사하거나 거의 일치하는 형태로, 또는 암묵적인 형태로 발견됩니다. 특히 누가복음 4장 16-21절에 묘사되고 있듯이, 예수께서 회당에서 직접 읽으셨던 이사야 61장 1-2절의 본문에 정확히 대응합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는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본 구원 사건, 더 정확히는 그러한 구원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시간,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들을 가리킴으로서 예수 자신의 정체에 관한 요한의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 4:21)는 이야기를 돌려서 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메시아인지 궁금하다면, 지금 이 시간, 예수운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의 징조를 면밀히 살펴보라는 뜻이지요. 사복음서가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그리고 지금 예수 자신이 직접 언급한 그 모든 예수사건들,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당하고 있던 이들을 살려낸 그 표적들과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의 선포는 구원의 시대,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들입니다. 예수는 지금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시대의 징조를 읽어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냐 아니냐보다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에서,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함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운동이 보여주는 시대의 징조로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Ⅳ. 시대의 징조를 공부하는 교회

다시, 마태복음 16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서 저는 16장 2-3절이 원문에 있었지만 후대에 삭제되었거나, 반대로 원문에 없었는데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모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이 구절을 성서본문에 포함시키되 대괄호로 구별해서 표시해두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후대에 추가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의 가치가 다른 구절들보다 결코 떨어진다고 보진 않습니다. 저는 16장 2-3절이 굳이 추가된 이유를 방금 살펴본 11장 2-5절 본문과의 연관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예수가 답했듯이, 예수가 일으킨 모든 기적들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복음의 선포는 예수의 초월적이고 신적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심지어는 예수의 메시아적 개성이나 인격을 입증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지금 이 시간’(the present time; ὁ νῦν καιρός)이 메시아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메시아의 시대임을 보여주는 징조들일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함께 일으켰던 예수운동에서 일어난 모든 구원과 해방의 사건들은 예수 개인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를 넘어서, 그 시대가 바로 메시아의 시대임을 보여주는 시대의 징조들로서 의미를 갖는 것들입니다. 기적의 스펙타클한 외양이나 예수님의 신비로운 인격에 신경 쏟지 말고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를 살피는 데 집중하라는 경고로서 16장 2-3절이 문맥상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에 의해 추가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시대의 징조’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시대’의 원어는 ‘카이로스’(kairos; καιρος)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에선 때나 시간, 시대를 가리키는 단어로 두 가지가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입니다. 그런데 메시아적 시간, 메시아의 시대를 암시하는 대목에선 주로 카이로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혹시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의 제일성(第一聲)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가복음 1장 1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다’(The time is fulfilled; πεπλήρωται ὁ καιρὸς)! 이것이 메시아 예수의 공식적인 첫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쓰인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그 ‘때’가 단순히 계획되어 있거나 예정되어 있던 달력상의 몇월 며칠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카이로스적 시간과 크로노스적 시간의 차이를 오늘 자세히 다 설명드릴 여유는 없을 것 같고, 대신에 간단히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카이로스적 시간은 크로노스적 시간, 즉 규정가능하고 계산가능한 연대기적 시간이 있을 때 바로 그 시간 속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는, 그 시간과의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한, 그 연대기적 시간을 끊임없이 빠져 나가는 어떤 질적이며 결정적인 시간을 의미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컨대, 크로노스적 시간의 차원에서 보자면, 2014년 4월 16일은 그 전날과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는, 365일 가운데 그저 하루에 불과하겠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만큼은 그 어떤 날들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카이로스적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에겐 1970년 11월 13일이, 또 어떤 이들에겐 1980년 5월 27일이 그런 날일 수 있겠지요. 메시아적 시간, 메시아의 시대 역시 그와 같은 카이로스적 시간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그 도래가 예고되었고, 예수운동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그 의미가 드러났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마침내 이 땅에 메시아의 시대가 완전히 도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역시, 지금 이 시간, 메시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종말의 시간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고,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에 이루어질 시간의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남겨진 시간’, 바로 그것이 메시아의 시대입니다. 교회의 존재 의미는 이러한 메시아적 시간의 반복적인 경험 속에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 메시아의 시대를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시대의 징조들’을 읽어냄으로써, 역사의 흐름 속에서, 특히 민중사건 속에서 메시아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직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의 교회도 여전히 메시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시간의 종말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면서, 지금 이 시간을, 이미 시작된 그러나 아직 완료되지 않은 종말론적 긴장의 상태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그런 태도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크로노스적 시간을 중지시키는 카이로스적 시간의 침입, 하느님의 통치를 이 땅에 도래하게 만드는 그 어떤 종말론적 투쟁에도 교회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역사적 시간 속에서 구원의 경륜에 대한 지각을 잃어버리고, 교회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종말과의 즉각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긴장마저도 사라짐에 따라,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교회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메시아의 현존을 증언할 수 있는 역량이 교회에선 더 이상 발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는 ‘에클레시아-코뮌’(Ecclesia-commune)이 더 이상 아닌 것입니다(행 2:43-47; 4:32-37 참조).

오늘 읽은 마태복음 11장 6절에서 예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있습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간이 메시아의 시대임이 확실하지만, 그래서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모든 역사가 그리스도인들의 기대대로 좋은 방향으로만 전개되진 않을 것이라는 간접적인 인정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라 할지라도, 요한과 그 제자들, 예수의 지지자들과 당시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고대했던 그런 메시아상(像)에 예수님이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그래서 앞으로 수많은 이들이 실족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시대는 구원과 해방의 시대, 성령의 제3시대, 시간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종말의 시대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종말을 끊임없이 연기시키고 역사를 지속시키려는 힘이 강하게 작동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자신들을 이 세계 속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나그네처럼, 마치 타향살이 하는 이들처럼, 임시 체류 중인 이방인들처럼 인식하면서 우리 시대의 역사 안에 메시아가 현존하는 표징을 읽어내고 그 안에서 ‘구원의 경륜(經綸)’(Economy of Salvation)을 사유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치열한 인식과 긴장의 태도가 사라지면 교회는 더 이상 메시아의 시대의 교회가 아니며, 사실상 메시아 예수와 무관한 집단이 되고 맙니다.

이제 두 달 뒤면 우리 교회도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게 될 텐데요. 그때 바울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기념예배에 귀빈으로 초대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초대를 받아서 교회를 방문한 그들이 과연 우리 교회를 보면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요? 그들은 처음엔 당황할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의 시대에 곧 도래하리라 믿었던 종말이, 혹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래서 교회의 역사가 무려 2000년이나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당연히 놀라지 않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만일 우리 천안살림교회의 20년 역사가 다른 교회들처럼 교회의 역사적 기원과 종말을 긴장 속에 두면서 끊임없이 크로노스적 시간(연대기적 시간)을 중지시키고 종말의 시간(카이로스적 시간)을 그 안으로 가져오려는, 그래서 시간의 종말을 실현하려는 필사적인 의지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더욱 더 실망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봅니다. 천안살림교회의 20년 역사는 20년이라는 그 연대기적 시간 내부에 안주해온 시간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역사적 요구에 매 순간 충실히 응답하며 메시아적 시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메시아적 사건의 반복을 위해 치열하게 경주해온 시간이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천안살림교회가 메시아의 시대의 징조를 해석하는 것을 교회의 공부 과제로 삼아 지금 이 시간, 이 세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언할 수 있는 그런 메시아적 사건의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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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