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빼앗길 수 없는 삶의 기쁨 - 요한복음 16:16~2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4-30 13:33
조회
1597
2023년 4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빼앗길 수 없는 삶의 기쁨
본문: 요한복음 16:16~24



오늘 본문말씀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긴 고별사(13:31~17:26)의 한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이 고별사는 요한복음의 1/5을 차지할 정도로 양적 비중이 큽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일러주는 말씀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이 이해하는 예수의 말씀의 핵심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본문말씀을 요한복음 16:16~24절로 한정했지만, 사실 이 본문말씀은 이어지는 33절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그 내용과 더불어 그 의미를 생각할 때 전반적인 말씀의 취지가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사실 언뜻 봐서는 그 뜻을 금방 알아보기 쉽지 않은 내용으로서, 상당한 긴장감이 배어 있는 매우 묵직한 말씀입니다.
33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매우 특징적인 대비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고 옴, 슬픔과 기쁨, 고난과 평화, 요청과 수락, 봄과 보지 못함, 비유와 공개적인 말, 불신앙과 신앙, 세상과 하나님이 계속 대비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대비는 이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성격을 분명히 해 줍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반전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이 말을 두고 제자들은 설왕설래합니다. 도대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알아차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말씀과 함께 예수께서는 한 가지 비유로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비유의 의미를 다시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지금 너희는 슬픔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전제합니다. 조금 있으면 고난을 겪고 마침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 다시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죽임을 딛고 일어선 부활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 예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깨우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요청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그 희망이 이뤄지리라는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25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비유 대신에 당신이 말씀하신 말씀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밝힙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돌아갔다가 되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 죽음의 순간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시련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33절에서 예수께서는 선포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오늘 33절까지 이어진 본문말씀은 시련으로 절망하기보다는 장차 맛볼 기쁨을 바라보며 용기를 갖고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집약하면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선언은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이 단호한 확신은 특별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6~27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특별한 증거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요한복음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로고스가 싸르크스가 되었다,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인권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어떤 세상 권세에 의해서도 짓밟히고 휘둘릴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문에 해당하는 17장 가운데 15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구체화됩니다. 요한공동체의 또 다른 성서인 요한1서 4장 7~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뭐가 있을까요? 요한의 문서들은 일관되게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시인 토마스 트래헌(Thomas Trahern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사랑을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따로 있고, 사람을 향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향한 배타적 사랑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을 향한 제한없는 사랑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공동체의 일관된 그 삶의 태도가 증오와 적대의 환경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요한공동체의 기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 사랑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믿음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 배어 있습니다. 그 증오와 적대에 편승해 그에 맞서는 증오와 적대를 강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승화된 사랑의 삶으로 그 증오와 적대를 넘어섰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요한공동체의 그 믿음에 근거해 볼 때, 오늘 본문말씀의 단호한 확신은, 우리가 그 사랑을 체감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 서로 사랑을 나누는 인간의 삶, 그것이 그 누구에 의해 파괴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요한공동체의 믿음,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처럼 구체성을 띠고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이들, 곧 세상의 권력은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고 그 목숨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외칠 때 세상의 권세는 힘을 잃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외치는 것을 들으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외침을 하늘이 들으셨다는 것은 성서에도 나오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관념 가운데도 있습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을 아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권력은 진실을 가리고 인간을 옥죔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을 가리고 인간을 옥죄면 옥죌수록 스스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하책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로서 그 사랑을 나누며 살겠다고 외칠 때 그 권세는 힘을 잃습니다. 세상의 권세가 ‘아, 그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통감하는 순간, 하늘의 응답이 내려지는 순간입니다. 그 응답을 들을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태 3:10)
오늘 이 땅의 세상의 권세자들이 이 말씀의 진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연약한 이들을 돌보고 서로 존중하는 삶을 장려하고, 갈등에 부딪혔을 때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지혜를 발휘하기보다는 강자만이 살아나는 삶의 법칙을 강요하고, 강대강 힘의 논리로 상대를 자극하여 분노와 증오감을 불러일으키고, 걸핏하면 거짓말과 변명을 일삼는 권세는 존재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에 편승하고, 더불어 혐오와 적대의 논리로 무장한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온전히 사랑만이 이긴다는 진실, 그로 인한 삶의 기쁨을 빼앗길 수 없다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감하는 그 사랑을 펼치는 사람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 그 믿음으로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