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칼럼] 차별의 정체성, 사랑의 정체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0-03 10:59
조회
982
대전일보 칼럼 04 / 2018년 10월 3일자
차별의 정체성, 사랑의 정체성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말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 말씀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신문은 말씀이 구현되어야 할 삶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 삶의 현실은 비단 수동적 의미에서 말씀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재조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진실을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게 중요성을 지닌다. 그 점에서 칼 바르트의 경구는 성경의 말씀과 삶의 현실 사이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우리 사회 일부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인식하는 매체로서 신문보다는 유튜브가 더 선호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현실을 전한다는 유튜브가 온통 현실을 왜곡한 가짜뉴스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매체를 접하는 사람에게서 건전하고 상식적인 판단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는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선교를 표방하는 ‘에스더기도운동’이라는 기독교단체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단체와 그에 열광하는 이들에게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가짜뉴스’가 들린 셈이다. 그 단체의 유튜브 매체는 차별금지법 반대를 비롯하여 인권조례 반대, 종북논쟁, 그리고 반동성애, 반이슬람, 반난민, 반페미니즘 등의 논리를 왕성하게 쏟아내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실상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 말씀의 진실 또한 왜곡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지속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그러한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펼치는 이들이 일부 몰상식한 소수 기독교세력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일까? 문제는 그와 같은 극단적 논리를 용인하고 사실상 배태한 한국 보수 기독교의 기본적인 토양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기독교 안에서 그와 같은 차별과 혐오의 역사는 뿌리 깊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불온한 욕망은 마치 고질병처럼 한국 기독교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치부를 가릴 수 있고, 어떤 정치적 효과까지 거두게 될 때 그 증상은 더욱 깊어진다.
한국 기독교에서 그 불온한 욕망은 오랫동안 반공주의를 통해 표출되어 왔다. 여전히 반공주의 폐해의 영향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 반공주의를 매개로 동맹관계에 있던 정치세력이 약화되고 더불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현저히 낮아진 상황 가운데서 한국 기독교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강화해가고 있다. 한국의 유수한 두 개의 장로교단이 성적 소수자를 돌보는 목회자를 버젓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또 다른 장로교단이 교회 내 개혁적인 단체들에 대한 일종의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한국 기독교 안에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 고질병의 한 증상이다.
어떤 것을 지향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느냐, 어떤 것을 반대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느냐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천당과 지옥의 차이를 지닌다. 혐오와 증오를 유포하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고 그에 현혹되는 사람들, 누군가를 정죄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과연 천당을 살고 있는지 지옥을 살고 있는지는 반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삶인데, 증오하고 반대하는 데 정열을 쏟는 삶이어야 할까?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야고보 2:1)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야고보 2:8) 성경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말씀이며, 성경의 대강이 되는 말씀이다. 차별 없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 단순하고 명료한 진실을 깊이 새길 수 있다면, 오늘 한국 교회와 사회가 이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차별의 정체성, 사랑의 정체성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말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 말씀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신문은 말씀이 구현되어야 할 삶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 삶의 현실은 비단 수동적 의미에서 말씀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재조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진실을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게 중요성을 지닌다. 그 점에서 칼 바르트의 경구는 성경의 말씀과 삶의 현실 사이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우리 사회 일부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인식하는 매체로서 신문보다는 유튜브가 더 선호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현실을 전한다는 유튜브가 온통 현실을 왜곡한 가짜뉴스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매체를 접하는 사람에게서 건전하고 상식적인 판단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는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선교를 표방하는 ‘에스더기도운동’이라는 기독교단체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단체와 그에 열광하는 이들에게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가짜뉴스’가 들린 셈이다. 그 단체의 유튜브 매체는 차별금지법 반대를 비롯하여 인권조례 반대, 종북논쟁, 그리고 반동성애, 반이슬람, 반난민, 반페미니즘 등의 논리를 왕성하게 쏟아내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실상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 말씀의 진실 또한 왜곡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지속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그러한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펼치는 이들이 일부 몰상식한 소수 기독교세력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일까? 문제는 그와 같은 극단적 논리를 용인하고 사실상 배태한 한국 보수 기독교의 기본적인 토양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기독교 안에서 그와 같은 차별과 혐오의 역사는 뿌리 깊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불온한 욕망은 마치 고질병처럼 한국 기독교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치부를 가릴 수 있고, 어떤 정치적 효과까지 거두게 될 때 그 증상은 더욱 깊어진다.
한국 기독교에서 그 불온한 욕망은 오랫동안 반공주의를 통해 표출되어 왔다. 여전히 반공주의 폐해의 영향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 반공주의를 매개로 동맹관계에 있던 정치세력이 약화되고 더불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현저히 낮아진 상황 가운데서 한국 기독교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강화해가고 있다. 한국의 유수한 두 개의 장로교단이 성적 소수자를 돌보는 목회자를 버젓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또 다른 장로교단이 교회 내 개혁적인 단체들에 대한 일종의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한국 기독교 안에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 고질병의 한 증상이다.
어떤 것을 지향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느냐, 어떤 것을 반대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느냐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천당과 지옥의 차이를 지닌다. 혐오와 증오를 유포하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고 그에 현혹되는 사람들, 누군가를 정죄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과연 천당을 살고 있는지 지옥을 살고 있는지는 반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삶인데, 증오하고 반대하는 데 정열을 쏟는 삶이어야 할까?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야고보 2:1)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야고보 2:8) 성경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말씀이며, 성경의 대강이 되는 말씀이다. 차별 없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 단순하고 명료한 진실을 깊이 새길 수 있다면, 오늘 한국 교회와 사회가 이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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