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07]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 - 데살로니가전서 5:12~2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10-30 22:23
조회
1604
천안살림교회 2013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3년 10월 30일 / 최형묵 목사


제7강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 - 데살로니가전서 5:12~28


0.

데살로니가전서 마지막 부분은 그렇고 그런 좋은 이야기로, 또는 어떠한 상황, 어떠한 공동체에나 적용될 수 있는 권면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일관되게 주목해온 것처럼, 이 서신은 전체로서 하나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까닭에 이 마지막 부분 역시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상황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일관되게 강조해 온,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꾸준히 계속하라는 권면은 이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그 내용은 크게 공동체 내의 지도자와의 관계, 믿음의 불안정, 그리고 종말에 대한 대비 등으로 나누어진다.


1. 공동체의 덕과 각자의 몫 -  5:12~18

이 부분은 서로 격려하고 덕을 세우라는 앞부분의 내용과 직결된다. 12절은 공동체내에 모종의 지도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공동체 내의 지도력은 훗날 제도화된 교회의 직분과 같은 것은 아니다. 자발적 열성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돌보고 지도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일 사도가 공동체와 함께 했더라면 사도의 몫이 되었을 것을 담당하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을 사랑으로 극진히 존경하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권면은, 공동체 내에 그들의 역할을 다소 귀찮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역할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의 역할을 배타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전체의 화목과 온전함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감당하여야 할 몫을 강조한다(훗날 ‘만인사제직’의 맹아). 그 권면의 내용은,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게으른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소심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약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은 열광주의에 사로잡혀 일상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을 말하며, 마음이 약한 사람은 박해로 말미암아(2:14) 믿음이 불안정해졌거나 죽은 이들에 대한 걱정(4:13)으로 동요하는 이들을 말하며, 힘이 없는 사람들(약한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에 매여 새로운 믿음의 확신이 결여된 이들(로마 14:1 참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형태로 불안정한 사람들을 서로 돌보라는 권면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하라는 권면으로 더욱 강조된다. 그 권면은 매우 근본적인 윤리적 태도를 함축하지만, 앞의 구체적인 권면과 관련해서 이해하자면 공동체 내에 이야기된 불편한 상황을 또다시 불편한 상황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대처하지 말고 그 불편함을 넘어 서로를 세울 수 있는 방식으로 대처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럴 때 공동체는 기쁨, 기도, 감사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동시에 기쁨, 기도, 감사의 생활을 할 때 공동체의 온전성이 보전될 수 있다.  


2. 일상생활을 넘어서는 삶의 차원 - 5:19~24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데살로니가서의 미묘한 자장은 이 대목에서 다시 확인된다. 극단적인 열광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상생활에서의 책임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말하고 있다.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예언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일상의 삶을 초월하는 낯선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한계지워진 인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대목에서도 매우 균형잡힌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모든 것을 분별하라고 한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이다(나중에 이것도 은사 가운데 하나가 된다. 고전 12:10 참조). 일상의 삶을 초월하는 차원을 인정하는 것이 맹목적 열광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재삼 확인하는 것이다.

그 일상의 삶을 초월하는 차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경지를 말한다. 통상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시 언급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인간을 ‘영ㆍ혼ㆍ몸’으로 삼등분하여 말하고 있는 표현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유일하게 등장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통하여 인간학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기보다는, 인간 삶의 그 어떤 차원도 배제하지 않고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을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바울은 그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단언으로 맺고 있다.      


3. 마지막 인사와 기원 - 5:25~28

마지막 인사에서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전제했던 공동체와 사도의 관계를 환기시킨다. 사도 바울은 내내 공동체에 대한 권면과 기원을 한 후 이제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한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도와 공동체의 관계를 말한다.

그리고 거룩한 입맞춤으로 형제자매에게 문안해 줄 것을 요청하며 이 편지를 읽어 주라고 권한다. 거룩한 입맞춤은 형제자매애를 나타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법이었으며, 통상 그 입맞춤 뒤에 예배와 만찬을 행하였다. 여기서 편지를 읽어 주라는 주문은 누구나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오늘의 감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주문은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사도의 편지가 공동체에 도착했을 때 공동체 성원들은 모두 감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읽어 주어야만 글을 못 읽는 사람들도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읽어주는 것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성서가 형성된 한 단면을 드러내준다.

맨 마지막 인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원하는 것으로 끝맺음되어 있다. 통상 사도 바울은 인사시 은혜와 평화를 기원하는데, 여기서는 가장 간결한 형태로서 은혜를 기원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한마디로 함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데살로니가전서는 일반적으로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비교할 때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다. 그것은 다른 서신들이 신학적 논제를 뚜렷이 하고 있는 반면 최초의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는 그러한 성격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 성격의 차이는, 바꿔 말하면, 다른 서신들은 가르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데살로니가전서는 그보다는 상호 교감하는 성격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교회의 선포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하나의 전형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야말로 교회의 선포의 범례로 새삼 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 다음 주제는 기록된 순서를 따라 갈라디아서 읽기입니다.
전체 2
  • 2013-10-25 18:10
    너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좋은걸 그동안 왜 빠졌나 아까웠습니다. 앞으로도 잊지 말고 꼭 챙겨야 할텐데 말입니다.
    rn

  • 2013-10-29 09:42
    매번 잊지 않도록 문자 띄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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