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13]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호소함 - 갈라디아서 3:1~1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2-05 22:45
조회
1266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2월 5일 / 최형묵 목사


제13강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호소함 - 갈라디아서 3:1~14


1.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끝맺으려는 어리석음 - 3:1~5


바울은 바로 앞 부분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일종의 대전제로 밝힌 후 이제부터 조목조목 갈라디아 교회 교우들이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 지적하며 보다 상세한 논증을 펼치기 시작한다.

바울은 먼저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이 어리석다고 질책한다. 바울은 자신의 선포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환기하며 도대체 누가 그렇게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는지 탄식한다. 바울은 이 대목에서 일관되게 반문하는 형식으로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을 일깨우고자 한다. 여기서 바울은 딱 한 가지 초점에 집중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을 맺으려고 합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은 복음을 믿음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된 사건을 말하고, 육체로 끝을 맺으려 한다는 것은 할례를 함으로써 율법에 속박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성령으로 인한 그 체험의 의의를 강조한다. 그 체험이 이제 정녕 허사가 되고 말았느냐 반문한다.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복음을 믿게 되었으나 이제 그 길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체험이 어떤 열광주의적 체험이나 황홀한 체험인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체험이 기존의 어떤 인과율로써는 설명될 수 없는 놀라운 체험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2.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자손들 - 3:6~9


바울은 이제 구약성서의 내용을 환기하고 구체적인 몇 구절들을 증빙본문으로 들어가며 자신의 논지를 더욱 분명히 한다. 바울이 굳이 구약성서의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유대교의 전통 안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홀린 사람들이 구약성서의 내용을 들어 율법의 정당성, 곧 할례의 정당성을 역설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내용과 구체적 구절들을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당시 유대교적 전통 안에서 율법을 행하는 귀감으로 여겨진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은 귀감으로 해석한다. 바울의 이 해석은 로마서 4장에서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는데,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게 될 것(창세기 12:3)이라는 말씀을,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이방인들도 믿음을 갖게 되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선민의 귀감인 아브라함을 만민의 구원의 귀감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4장에서 더 구체화되고 있듯이, 이 주장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업적으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복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복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에 의해 의롭게 인정된다는 주장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여기서 재삼 확인된다. 그것은 율법 곧 특정한 체제에 의해 배제되었던 자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 안에서는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에 의해 의롭게 인정된다는 것은, 현대적 개념으로 인권의 문제의식과 상통한다.      


3. 율법의 저주와 믿음의 복 - 3:10~14


아브라함의 실례를 든 후 바울은 아주 현란하게 구약성서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바울은 먼저 신명기 27:26을 들어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언뜻 보기에 율법의 조목들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 기준에 비춰볼 때 언제나 결함을 지닐 수밖에 없고, 따라서 완전한 의인으로서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이 주장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당시의 유대교의 해석과 다를 바 없다. 곧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해석이다. 바울은 적어도 이 대목에서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복에서 배제되어 저주받는 이들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원천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으로 인도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도덕률로서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로서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하바꾹 2:4을 인용하며, 주어진 조문이자 동시에 이미 그에 따라 짜여진 체제에 의존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고 인도하는 길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은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바울은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저주받은 것이라는 신명기 21:23을 인용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사람이 됨으로써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다고 말한다. 훗날 대속론의 근거가 되는 이 구절은 참으로 난해한 구절이다. 바울의 이 주장에는 확실히 흠 없는 희생제물을 통해 속량 받는다는 유대교적 관념이 깔려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바울은 잠재적 의식 가운데 유대교적 관념을 빌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르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율법은 죄 없는 그리스도마저도 저주 아래 놓이게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체제로서 율법의 그 무시무시한 효력을 보고서도 그것에 의존하려 한다면 말이 되겠느냐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속량의 의미는, 흠 없는 그리스도까지 저주 아래 놓이게 만드는 율법의 효력을 바로 그 끔찍한 사건을 통해 깨닫고 그로부터 절연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래도 율법에 의존하고자 합니까? 여러분!’ 하는 소리와 같다. 율법에 의존하는 것은  정말 헛된 길이라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바울은 그 의미를 강조하는 의도로, 이미 아브라함에게서 미리 드러났던 바와 같이 율법 밖의 사람들 곧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에게서 확연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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