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14] 율법과 약속 - 갈라디아서 3:15~2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2-12 23:42
조회
880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2월 12일 / 최형묵 목사


제14강 율법과 약속 - 갈라디아서 3:15~25


1. 율법과 약속 - 3:15~18


앞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말하였던 바울은 일상생활에서의 법적 계약의 용례를 들어 보다 상세하게 율법과 약속의 관계를 해명한다. 바울은 일상생활에서 한번 계약을 맺으면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거기에 어떤 것을 덧붙일 수 없다는 것을 환기한다. 여기서 바울이 유념하고 있는 계약은 어떤 관행일까? 통상적으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계약은 변경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계약이 유대 전통에서 기증자로부터 기증받는 자에게 재산이 양도되는 계약(‘마테나트 바리’)을 전제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 계약은 기증자가 죽는 경우에도 양도가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유대의 관례를 유념한 것이라면 바울의 이방인 청중에게는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그러기에 바울의 이 주장은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계약의 효력을 강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곧 계약이 성립되면 갱신의 절차 없이 임의로 그것이 변경될 수 없는 관행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의미를 보충하기 위해 바울은 다시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바울은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브라함에 관한 성서의 구절을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는 방편으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실 때 복수가 아닌 단수로서 ‘자손’에게 약속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 자손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말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에게 물려진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약속은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 맺은 약속이 그보다 430년 뒤에 생긴 율법에 의해 무효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다는 출애굽기 12:40에 근거한다. 그러니까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이 무효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약속과 모세의 율법은 모순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바울은 그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2. 율법의 제한적 의의 - 3:19~20


바로 앞의 주장을 보면, 약속과 율법은 모순되는 것으로서 ‘분리’ 가능성을 안고 있다. 바울은 약속과 율법을 명백히 구별한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라 믿던 유대교의 전통에 반하여 약속을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유대교의 길과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그 양자를 완전하게 분리하기보다는 일종의 도구적 기능을 율법의 유용성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 죄를 밝히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어쨌든 율법의 유용성을 제한적으로 인정한 셈인데,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산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말한다. 일일이 규제하는 법이 없이도 선하게 사는 경우를 말한다. 이 말은 나아가 법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은 어떤 규제를 필요로 하는 인간 삶의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로마세계에서의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분 전통, 그리고 유대교 안에서 성서의 율법과 이방의 법들의 구분 전통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궁극적인 진리의 차원과 상대적인 법의 차원을 구별하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 자체를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바울은 그것 역시 이방인들의 법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난해한 구절의 의미도 그와 관련되어 있다. 우선 율법은 천사들을 거치고 중개자의 손을 거쳐 제정되었다는 것은 당시 유대교의 전통을 반영한다. 시내산 이야기에 천사들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후에 유대교에서는 율법이 천사들을 거쳐 중개자 곧 모세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바울은 일단 그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중개자는 한쪽에만 속해 있지 않는 반면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정말 난해한 구절인 20절은 그 관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개자는 다수의 조정자를 뜻한다. 따라서 율법이 그렇게 중개자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은 다수의 의견을 조정 종합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곧 상대적이라는 이야기이다. 반면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것으로,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의 절대적 성격을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를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3. ‘몽학선생’으로서 율법 - 3:21~25


21절 이하의 본문은 바로 앞의 주장을 보충한다. 바울은 율법과 약속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냐 스스로 반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문 형식은 아마도 바울에 대한 공격자들의 태도를 유념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에 대해 꼭 그렇지는 않지만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달라는 취지로 그 반문에 대해 답한다. 율법이 인간 삶의 현실에서 불가피하게 통용된 측면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생명과 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율법이 불가피하게 통용된 측면을 바울은 ‘몽학선생’(개역) 또는 ‘개인교사’(표준새번역)이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선생’이든 ‘교사’든 그 의미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원문상의 단어는 정확하게 말하면 그와는 다르다. 그리스어로 그런 의미의 ‘교사’는 ‘디다스칼로스’인데 반해 여기에 등장하는 ‘파이다고로스’는 학교에 학동과 함께 갔다가 돌아오는 ‘노예’를 말한다. 이 노예의 임무는 학용품을 날라다 주기도 하고, 학동을 보호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학동들은 사춘기까지 이 노예의 감독하에 있었다. 이 역할은 흔히 회초리로 상징되었고, 굳이 말하자면 ‘훈육’ 정도의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이 ‘파이다고로스’라는 이야기는 인간이 타율적 규제를 받아야 하는 미숙한 상태에 있을 때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바울은 그 역할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제한된 것일 뿐이라 강조한다. 그리스도가 도래한 의미는 타율적 규제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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