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15] 종의 길과 자녀의 길 - 갈라디아서 3:26~4:7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2-19 22:17
조회
1239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2월 19일 / 최형묵 목사


제15강 종의 길과 자녀의 길 - 갈라디아서 3:26~4:7


1. 하나님의 자녀 - 3:26~29


앞에서 율법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인을 겨냥해 말했던 바울은 이 대목에 이르러 이인칭 복수로 그 주어를 바꾸면서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곧 이방인들의 지위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단적으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에게도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말하는 바울은 주장은 흥미롭고 급진적인 표현들을 담고 있다.

2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당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합류하는 절차와 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유일하게 언급된 세례가 바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세례에 대해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기보다는 다소 엇갈리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는 하나의 절차로서 세례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4:6의 ‘아들의 영’에 대한 언급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불분명하고, 고린도전서 1:13~17을 볼 것 같으면 세례를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바울은 당시 행해지고 있는 세례의 의미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떤 주술적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바울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영의 역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쨌든 그 결과로 그리스도로써 옷을 입을 입었다는 것은, 그 표현이 신적 변형의 사건을 함축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당대의 언어적 관례를 통해 볼 때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을 뜻한다.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은, 기존의 모든 대립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사이에 종교적ㆍ사회적 차별이 없어진다. 바로 여기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주장의 핵심적 요체가 담겨 있고, 또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급진성이 드러나 있다. 이 주장은 확실히 종교적 차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차원까지 포함한 것으로, 비단 바울에 의해서만 주장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고대 세계의 많은 현자들에 의해 공유된 이상이었다. 바울에게서 그 주장이 특별한 의의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상을 실현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데 있다. 그 이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없었던 철학자들에게서 그 이상은 그저 내면화의 차원에 머물 뿐이었다. 예컨대 철학자인 노예는 자유롭다 불리는 반면 정욕의 노예인 자유인은 결코 자유롭다 불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에 바울에게서 이 주장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바울의 이 주장이 당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현실적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구현되었는가, 나아가 정치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차별이 없다는 점은 철저하게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종과 자유인의 경우는 어땠을까? 예를 들어 빌레몬서를 보면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도망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주장과 동일한 메시지에 고무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에게 되돌려 보낸다. 바울은 현실적으로 오네시모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에서 고통스러운 권면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더불어 당대의 정치사회적 기존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 피를 불러일으키는 진압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염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조건 안에서 바울의 주장 역시 일정하게 내면화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빌레몬서의 바울의 현실적 권면이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전거로 오용되어 왔지만, 갈라디아서의 이 구절이 영지주의자들과 수도사들, 그리고 세속적인 입법에 끊임없이 영향을 줬던 것을 쉽사리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에게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 문제는 더더욱 논란거리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명백하게 차별의 무용성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유보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당대의 관습에 대한 현실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울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적인 고려에서 나온 주장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어진다는 본문의 진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한다고 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 종의 길과 자녀의 길 - 4:1~7


바울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통틀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지위에 대해 거듭 말한다. 정당한 상속자라 하더라도 아직 어렸을 때에는 보호자나 관리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법적 관례를 통해 이를 해명한다.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서 종노릇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세상의 유치한 교훈’이라 번역된 말은 직역하면 ‘세상의 원시종교들’이라는 말로서, 이 세계가 몇 가지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당시 종교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원소들은 물질적 차원의 요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적대적인 악마적 실재들로 간주되는 것들이었다. 고대의 많은 종교들은 그 악마적 존재들을 달래기 위해 제의와 마법 등을 발전시켰고, 사람들은 실제로 그 노예상태로 살아갔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바울은 3:13에서 말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속량을 다시 언급한다. 확실히 유대교적 믿음에 따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전반적 논지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헤아렸던 관점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보내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체험과 확신의 차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아바, 아버지”는 아람어 ‘아바’와 그리스어 ‘파트론’을 동시에 사용한 표현으로서 당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격을 말해 주고 있다.
전체 2
  • 2014-02-25 00:17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들을 했나요?
    rn첨삭할 것은 없습니다.

  • 2014-02-25 11:10
    대충, 정리해서 올려 놓으셔도 알아들을 귀가 있는자는 들릴 것입니다.
    rn너무 정확하면 그게 또 하나의 도그마(교리)가 되겠죠...ㅎㅎ
    rn너무너무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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