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22] 빌립보서 읽기를 시작하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4-09 23:34
조회
1331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4월 9일 / 최형묵 목사


제22강 빌립보서 읽기를 시작하며


1. 빌립보서의 기록 문제


빌립보는 바울의 유럽 최초의 선교지로서, 바울이 빌립보 땅에 발을 내딛은 것은 49~50년경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이곳에서 단 며칠 머무르며 선교의 씨앗을 뿌렸는데,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을 경과한 후 빌립보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빌립보서는 대략 그 땅을 떠난 지 대략 3년 정도 후, 그러니까 52~53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어디에서 썼는지는 여러 가지 설(로마, 고린토, 에페소 등)이 있지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빌립보서는 바울의 친서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그것이 단일한 서신인가 하는 점에서는 논란이 있다. 다시 말해 문체와 내용상 단절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대목들이 있어, 아마도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전해진 편지가 후대에 하나로 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1:1~3:1a; 4:2~7; 10~23은 옥중서신으로 서신 A, 3:1b~4:1; 8~9는 투쟁서신으로 서신 B로 분류된다.  


2. 최초의 유럽 선교와 빌립보교회의 탄생


바울의 최초 유럽 선교지 빌립보는 알렉산더 왕의 아버지 필립2세에 의해 합병된 도시로서, 주전 147년 마케도니아가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이 도시는 주전 89~84년 1차 미트리다스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고, 주전 42년 시저의 암살자인 부르투스와 카시우스 그리고 시저파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참혹한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주전 30년경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식민지로서 이름을 얻게 되었고 로마 퇴역군인들에 의한 식민이 지속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의 격전지가 됨으로써 그 도시 사람들의 삶, 특히 정신적 상황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불안정한 그 도시의 상황은 광범위한 종교혼합주의에서도 드러났다. 토착적인 신들과,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그리고 소아시아의 신들이 뒤엉켜 있는 도시풍경이었다 할 수 있다. 바로 그 곁에 번듯한 회당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미약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사도행전 16장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 지역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 무시아를 거쳐 드로아에 이른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밤중에 환상을 보며 한 외침을 듣는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결국 바울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이튿날 네압볼리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빌립보에 이른다.


3. 빌립보에서의 바울의 행보


빌립보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머물면서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강가를 찾아갔다. 이방인 지역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를 먼저 찾았다는 것은 바울의 초기 선교활동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미 바울이 소아시아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칠 때에도 항상 유대인 회당을 선교거점으로 삼았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이르러서도 똑같은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회당이 아니라 강가에 있는 기도처였다. 이것은 빌립보에 번듯한 유대인 회당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처소가 있다는 것은 소수의 무리이지만 유대인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강가의 기도처에서 바울은 모여 든 여자들을 만난다. 통상 유대인들의 모임은 남자가 10명 정도 모여야 정식 예배가 이뤄졌다. 따라서 강가 기도처의 모임은 정식 예배가 아니라 그저 여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정도의 모임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어 처음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유대인은 아니되 유대교와 그 공동체에 우호적이고 또한 함께 협력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통칭이다. 그들은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유대인 공동체의 유력한 후원자로서 역할하는 사람들이었다. 개종자들이 사회적 신분상으로 대개 낮은 계층에 속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대개 유력한 계층에 속했다. 사도행전은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는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다. 두아디라는 터키지역의 도시로서 루디아라는 이름은 개인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광의의 지역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 두아디라가 포함된 루디아 지역 출신이라는 뜻이다. 자색 옷은 황제를 비롯한 유력한 귀족들이 즐겨 입는 옷이다. 루디아 여인의 고객들이 유력계층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자주색 옷감 장수였다는 것은 그의 재력 및 신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중요한 정보를 말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 여인이 바울일행의 유럽 선교의 처음 열매가 되었다. 루디아는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 묵게 했다. 이 여인에 대한 개별적 정보는 이후에 더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의 선교에 의한 유럽지역에서의 첫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선교활동에 적지 않은 후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심에 이 여인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바울 일행은 그 곳에서 또 한 여인을 만난다. 귀신이 들려 점을 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자 노예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에는 정신적 장애가 질병으로 간주되지만 고대세계에서는 비범한 능력으로 간주되었다. 노예 신분으로서 그 여인은 일종의 회사 같은 데 매여 돈벌이를 해주고 있었다. 바울은 그 여자에게서 귀신을 내쫓는다. 그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사라진 것에 분격해서 바울 일행을 고발한다. 이로 인해 바울 일행은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이들은 감옥문이 열려 구금상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빌립보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바울일행이 단 며칠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다.

그렇게 잠깐 머무는 동안 씨앗을 뿌린 그곳에 공동체가 굳건하게 섰고, 그 공동체는 바울의 선교활동을 각별히 지원하였다. 빌립보서는 그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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