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다림의 식탁 - 고린도전서 11:17~34 [이성철 전도사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3-02-04 01:29
조회
1707
2023년 1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기다림의 식탁
본문: 고린도전서 11:17~34
이성철 전도사



고린도는 지금의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북쪽에 있으며 현재도 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에 자리해 있습니다. 주요한 항구도시를 부속도시처럼 거느린 고린도의 부유함은 오래전부터 유명했고,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고린도는 올림픽과 같은 대규모 운동경기로도 유명했습니다. 2년마다 큰 규모의 운동경기가 열리는데, 운동경기는 기본적으로 ‘경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쟁은 다른 이들을 제압하고 나서야 ‘나’의 이득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경쟁과 그로부터 얻은 승리의 결과는 남과 나눌 수 없는 것이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경쟁문화와 승자 독식의 사회가 계속될수록 사람들은 각자도생으로는 자신의 삶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같은 이득을 공유할 만한 사람들은 집단을 형성해갑니다.

이런 이익 집단은 후원자를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경제적, 정치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 후원자는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수혜자들을 필요로 하고, 수혜자들은 후원자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합니다. 이러한 패당과 경쟁의 문화는 결코 겸손을 미덕으로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공을 향한 갈망이 어디서나 쉽게 용인되었고, 남보다 자신의 잘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난은 무지와 어리석음의 결과이고, 약함은 지혜롭게 줄을 서지도 적절한 후원자를 찾지도 못한 탓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온전히 챙기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고린도가 부자들로만 가득 찼던 것은 아닙니다. 빈부격차가 극심했고, 조금이라도 성공을 거둔 이라면 더 높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거나, 그 사다리에 올라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상황 속 고린도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만찬, 주의 만찬에 대해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11장17-34절은 네 단계로 이뤄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주의 만찬 관행에 대해서 나무란 후에(17-22절) 성만찬 제정사 전승을 제시하고(23-26절), 그 전승을 그들의 상황에 맡게 적용하며(27-32절), 끝으로 그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합니다(33-34절).

17절에서 22절의 문맥에서 바울은 “한자리에 모이다”(συνερχομένων시네코마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거나 당파를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의 모습들이 대부분 건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형성되고 있던 고린도 교회도 사회의 여러 당파와 모임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에서 ‘식사’의 문제는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인종, 문화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그 중 ‘성만찬’을 둘러싸고 빈부의 갈등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레코-로만 사회에는 지역마다 나름의 식탁 문화가 있었습니다.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주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후원자’이었습니다. 후원자의 집에서 식사 모임을 할 때면 이런 장면이 연출됩니다. 먼저 후원인과 그 ‘친구들’은 가장 좋은 방에 모입니다. 그곳에서는 집주인과 먼저 온 그 친구들에게 좋은 음식과 술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평범한 손님들은 그 방 앞에 있는 넓은 뜰에 모여 식사를 합니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집주인이 먹는 식사에 비해 질이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취하는 심포지움, 곧 향연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노예나 노동자. 곧 자기 주인에게 묶여 있는 이들은 자기의 일을 다 마치고 또 자기 주인의 식사를 모두 챙기고 오느라 성만찬 식사에 제때 참여 할 수 없었고, 자신의 음식을 가지고 올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집주인이 음식을 남겨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것으로 부족했습니다. 결국 일찍 와서 먹고 마시던 사람들은 모임이 시작 되기도 전에 배부르고 취한 상태가 됩니다. 나중에 온 이들은 굶주린 채 배부르게 취해 있는 '주인들'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식탁, 바울이 전해준 성만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격노했습니다. 성만찬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의미를 제의적으로 재현하는 자리인데, 그 의미가 철저히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회의 질서를 반복하면서 오히려 분열을 강화하는 식탁을 차리고 있는 그 모습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만찬을 타락시키는 이들을 두고 "여러분이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역전 시킨 질서를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주의 만찬의 궁극적인 설립자이자 근원인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전승은 빵과 잔에 대한 말 뒤에 각각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리"는 지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반복해서 "기억하며" “행하는” 것을 통해 제의적인 재현이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을 다시 전해주었습니다.

바울은 이 공동체가 모두를 포괄하는 확대된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은 것처럼 말합니다. 다양한 신자들의 가정들로 이루어졌고, 또 믿지 않는 배우자를 둔 가정의 구성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인 공동식사를 위해 한데 모이는 것은 최근에 고린도에 설립된 이 공동체 안에 응집력을 형성하는데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하나로 연합해 있지 않았고, 예수의 죽음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인들로서는 모든 사람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바울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이 고민했던 문제는 고린도교회가 지배적인 제국 사회에 대한 하나님나라 운동의 대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에 있어서 지배적인 제국 사회를 닮아가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교회는 어느 정도 평등주의적인 공동체들이었고, 촌락 공동체의 촘촘한 관계들과 공동체적 연대성을 이뤄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나 빌립보처럼 훨씬 작은 도시들과 대조적으로, 고린도의 교회는 제국의 한가운데 있던 작은 수평적인 단체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후원자 제도 안에서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가 가진 혼란과 모순을 축소판의 모습으로 보여주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혼란을 야기 시키는 공간의 역할을 하게되었습니다.

이런 경고 후에 바울이 내놓은 해결책은 간단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신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향해 “몸을 분별하고”그리스도가 세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만약 구성원이 다 모일 때까지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배가 고플 것 같으면 자기 집에서 미리 먹고 오고 말했습니다. 구성원이 모두 모이는 그때 한 몸, 한 식구의 식탁을 펼쳐야 한다고 바울을 말합니다. 그것은 후원자들, 부자들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권리와 행동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득과 번영을 추구하던 고린도인들에게 권리와 자유의 포기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것이지만, 그것이 바로 바울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조직하고 있는 교회는 여러 차원의 비전을 지니고 있었고,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운동을 지배적인 제국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으로 여겼습니다. 성만찬 전승은 “새로운 언약”의 백성이 예수의 죽음을 통해 생겨난 공동체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예식이었던 성만찬을 통해 기념했던 것은 바로 새로운 언약공동체, “몸”의 성립이었습니다. 하나의 백성으로 “함께 모인”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연대하여 한 몸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문화를 자신들의 식으로 형식만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질서를 답습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쉽고, 몸에 익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닌 새로운 질서를 기존의 질서에 길들여진 자신들에게 맞추었습니다. 슬프게도 이천년전 고린도의 모습과 오늘 우리사회의 모습이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2001년 1월 22일 서울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휠체어를 탑승한 노부부가 장애인용 리프트에서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지난 22일은 사망 22주기였습니다. 22년이 흘렀지만 '장애인 이동권 보장' 문제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입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0.8%만 반영됐습니다. 전장연은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서울교통공사가 전장연이 2021년 12월 3일부터 작년 12월 15일까지 약 1년간 총 75차례의 지하철 시위를 통해 열차 운행 지연 피해를 봤다며 6억145만원의 손해배상소송를 청구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서울시장은 전장연의 시위 재개를 두고 "시장으로서 더는 시민의 피해와 불편을 방치할 수 없다"면서 "현장에서의 단호한 대처 외에도 민·형사상 대응을 포함해 필요한 모든 법적 조치를 다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출근길 선전전의 모습은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탑승을 재촉하지만, 분주한 객실에는 휠체어 3대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다. 경찰은 휠체어가 탑승하지 못하게 열차를 운행하는 기관사는 열차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같은 방송을 두어 번 반복합니다. “현재 우리 열차에 장애인 시위대 승차 중입니다. 문을 닫고 출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일 출근 시간 승하차에 평균 30초~1분이 소요되는 것을 생각하면 열차가 멈춰 선 시간은 길어야 3분입니다.

3분을 기다리지 못해서 지하철을 타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가 지웠던 존재들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민의 피해와 불편이라고 말할 때에 누군가는 시민이 아닌 존재로 이미 낙인 찍히고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탓을 기존의 질서를 깨뜨린다고 상대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대로 드러나지 말고 존재를 지우고 조용히 살아가라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것 입니다.

고린도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밥을 먹고 누가 오지 않았는지를 신경쓰지 않습니다. 보려고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20년 넘게 싸우며 지하철 승강기를 만들어온 장애인들이 승강기를 이용하려고 하면 왜 밖을 돌아다녀서 사람을 불편하게 하냐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성찬은 행하는 공간이 거룩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가 성찬의 초점이 아닙니다. 성찬을 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너와 나의 분리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연합을 이룹니다. 그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은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26-27절에서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은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장 연약한 지체와 늦게 도착하는 이들과 한 몸을 이룰 때 벽은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의 식탁과 경쟁의 식탁에서 그동안 먹어오던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밥상을 해체하고 다시 차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밥을 함께 나눠먹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주의 식탁을 차리길 원합니다. 풍성하게 차린 후 천천히 그 식탁을 함께 나누며 기다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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