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 - 이사야 58:6~12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10-01 16:35
조회
7055
2017년 10월 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
본문: 이사야 58:6~12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로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매우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종종 이야기합니다만, 해석의 여지없이 너무 분명한 말씀이라, 무슨 이야기를 덧붙여야 할지 막막해지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말씀이 선포된 맥락이 있기에, 그 맥락을 재삼 확인하면서 본문말씀의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세 번째 이사야의 선포로서, 그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와 공동체의 재건을 앞둔 시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58:6~12까지만 읽었습니다만, 사실은 1절부터 쭉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1절부터 환기하자면, 본문말씀은 먼저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허물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허물이 될까요? 마치 그것으로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듯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줄여 말하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이지만 그것이 곧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말끝마마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사안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신들의 욕망과 의도를 관철시키려 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선포는 구체적인 종교적 의례로서 금식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금식의 전통은, 주전 586년 유대 민족국가가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이후부터 그 비극적 사건을 되새기는 뜻에서 정례화되었습니다. 앞의 문맥과 연결해서 이해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은 정례화된 금식을 잘 지켰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그 백성들의 태도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은데 무엇 때문에 그런 고행을 해야 하느냐는 반문이 일어나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인 것이 이미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적 의례에 열심을 내면서 자신들에게 가시적 보상이 주어지면 그것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저 안 하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에서 그저 행할 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은 금식일에도 자신들의 향락만 추구하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는 질책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상거래행위를 하고, 채무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킨 현실을 말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들의 잇속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약자들에게 못된 짓을 다 하면서도 거룩한 체 하는 현실을 말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묻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심하게 꾸짖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느냐?” 종교적 의례가 그렇게 겉치레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금식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금식 대신에 인간을 향한 행위로 대체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 아니냐?”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모든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정신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될까요?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너희를 이집트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밑바탕에는 노예살이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그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을 형성한 가장 원초적인 경험입니다. 여기에서, 그 누구라도 타의에 의해 압제 상태에 놓인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사회가 지향하는  자유의 정신은, 이와 같은 성서의 정신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어 이렇게 선포합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역시 해석의 여지없이 명쾌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온전한 인간사회를 위한 연대의 정신을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민권이 없는 사람, 파산당한 사람, 노예, 감금된 사람, 굶주린 사람, 떠도는 사람, 추위에 떠는 사람, 갖가지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소수자들 ... 여기에 오늘날 사회적 약자의 목록을 더하자면 얼마나 더 추가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각 개인의 자유,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에, 아니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적 연대의 정신 역시 성서는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 속에서 자유와 연대 두 가지 가치는 결코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합니다. 자유를 주장하면 자유주의자로, 연대를 주장하면 사회주의자로 규정당하는 현실은 양자의 관계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가치가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사회의 미래를 보장될 수 없습니다. 성서는 그 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떤 두려움 때문에 종교적 계율을 지키고 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자유, 그리고 누구나 예외없이 특히 사회적 약자들 또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연대를 이룸으로써 공동체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계속해서 그 진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신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앞서 선포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재차 선포합니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사야의 이 예언의 선포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귀환하여 민족 공동체를 회복하고 성전을 다시 지으려는 그 시점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그 배경에 비추어 생각할 때, 오늘 본문말씀은 국가사회를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하는 그 기초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지향해야 할 바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저는 우리 사회의 실상을 드러내 주는 몇 군데 현장에 함께 하였습니다. KTX여승무원들의 농성현장에 들러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였고, 한국여성신학회와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주최하는 “한국교회의 동성애 혐오를 경계하다” 긴급토론회에 참여하였고, 그 날 저녁 때는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의 투쟁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 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단지 개인의 자격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한국 교회의 이름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또한 지난 주간에는 “‘북 해외식당 12명의 여종업원’ 진실규명을 촉구하고 추석 전에 그들이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촉구하는 신문광고에 교회 이름으로 동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마땅히 함께 하여야 할 자리입니다. 오늘과 같이 교회가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고 증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무엇인지, 교회의 본분이 무엇인지 재삼 확인할 수 있는 계기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랑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인이, 교회가 눈길을 주고 함께 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잠시나마 확인하는 계기였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떤 두려움 때문에 종교적 계율을 지키고 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자유, 그리고 누구나 예외없이 특히 사회적 약자들 또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연대를 이룸으로써 공동체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가족들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추석 명절을 맞이하며 더더욱 그 진실을 따르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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