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 진정한 삶을 - 골로새서 2:8~15[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4-08 17:22
조회
10273
2018년 4월 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 진정한 삶을
본문: 골로새서 2:8~15



오늘 본문말씀은, 성서에서 익숙한 또 하나의 그렇고 그런 좋은 말씀으로만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상당히 착잡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후의 상황을 충분히 헤아려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이 담긴 골로새서가 과연 사도 바울의 진서인가 하는 점에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썼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사도 바울의 사상을 잘 이해한 저자의 작품이라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어쨌든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골로새교회가 처해 있는 정신적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가운데 그 정황이 드러나 있듯이, 골로새서는 골로새교회에 어떤 ‘철학’이 문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제시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합니다.

8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그와 결부된 개념들이 말하듯이 일관되게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헛된 속임수’, ‘사람들의 전통’, 그리고 ‘세상의 유치한 원리’ 등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헛된 속임수’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헛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전통’ 또는 ‘세상의 유치한 원리’는 뭘까요? ‘사람들의 전통’은 신약성서의 다른 문맥에서 볼 때 낡은 관습 또는 인습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에서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이르는 말로도 통용되었습니다(마가복음 7:8). ‘세상의 유치한 원리’라는 말은 그렇게 번역되어도 무방하지만, 그것은 너무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직역하자면 ‘세계의 원소’를 뜻합니다.
‘세계의 원소’라고 하면,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 뭘 말하는지 대략 연상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이 무엇인지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그 원소들을 땅, 물, 공기, 불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오늘의 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타당치 않지만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 이해에 따르면 세계는 그 원소들의 순환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스문화권 안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러한 견해는 일정정도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구약성서 시대부터 이어져오던 신앙적 관념들과 융합하게 됩니다. 이 숙명적인 원소들의 순환에 매여 있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금욕’이라는 믿음이 형성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순수하다면 곧바로 달까지 승천하게 되지만 영혼이 순수하지 못해 지상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면 다시 세계의 원소들 가운데로 하강한다는 믿음이 그 예입니다.  또 어떤 영혼들은 반신적(半神的)인 영이 된다는 믿음 또한 동반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반신적인 영을 악마 또는 천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교회 안에 형성되었을 때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금욕을 구원의 방편으로 안 믿음은 먹고 마시는 것을 가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상의 원소들과 천상을 오가는 영에 대한 믿음은 초승달 축제나 각종 절기에 특별한 의식을 행하는 관습을 낳았고, 천사숭배를 낳았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16절 이하는 그 양태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런 믿음을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그런 믿음을 헛된 속임수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그리스철학의 사원소설을 동의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세계에 대한 이해와 구원의 길에 대한 믿음은 전혀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는 점입니다. 아까 말했듯, 사원소설 자체의 인과관계도 오늘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골로새서의 저자가 그 자체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이해와 구원의 길 사이의 인과관계에 관한 사람들의 믿음이 허황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헛된 속임수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 역시 그런 허황된 믿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어떤 실체나 진실에 상관없이 자기 편한 대로 엉뚱한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세계관을 구성하여 판단하는 태도는 그 허황된 믿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른바 창조과학도 그 한 예이며, 특정한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예컨대 에이즈와 동성애의 관계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퍼뜨리는 것도 그 예이며, 특정한 정책이나 생각을 자기 멋대로 이념적 구도에 맞춰 재단하는 것(예컨대 토지공개념은 사회주의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개념을 반영한 헌법안은 사회주의적이라는 억지)도 그 예입니다. 보편적 가치기준에서 볼 때 명백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정당성을 강변하는 태도(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 MB의 태도... 등등)도 그 예입니다. 잘못된 세계관은 이렇듯 숱하게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낳습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그 헛된 속임수를 떨쳐버릴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것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또 여러분은 범죄와 육신의 무할례로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무척 장황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의 요체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그로부터의 부활을 의미를 역설하는 것으로서, 바로 거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부활주일을 지냈고, 또 부활의 의미를 새겼지만,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관련된 본문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십자가 위의 죽음에서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깨달은 그 신앙의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요?
오랜 교회의 역사에서 그 의미는 희생제물로 죄를 대속했다는 이른바 대속론으로 설파되어 왔지만 그 의미가 과연 제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그 의미가, 오직 온전히 사랑의 삶을 실천한, 무고한 예수께서 죽임에 이른 것은 우리들의 무지와 방조 때문이었다는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 의미는 제대로 받아들여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 하나 희생됨으로써 우리는 편히 산다’는 차원에 머문다면 그것은 세상의 폭력적인 법칙을 용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희생제의를 정당화하는 대속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오히려 세상의 폭력적 질서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데 그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앞뒤를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또 이렇게 선포합니다.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이 선포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환상 아닐까요? 특히 이 마지막 선포는 로마의 황제가 개선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데,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개선장군이 될 수 있을까요? 거꾸로 바로 그 로마제국의 체제 안에서 완전히 배제당한 자들의 사형틀인 십자가 어떻게 승리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당시 세계의 법칙에서 볼 때 오히려 처절한 패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사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새긴 그리스도인들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그 사건은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주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진리를 압살하는 것이요 사람들의 삶을 압살한 사건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무고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이 세상 권세자들과 통치자들의 무모함을 폭로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악한지 몰랐을 때는 그들을  구원자로 착각했습니다. 그 때는 그들이 정해놓은 질서와 무관하게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는 예수가 무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체험하고서야 사람들은 그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깨닫습니다.
그 실체를 알지 못할 때는 헛된 환상으로 기대하고 때로는 두려움을 갖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될 때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고 따라서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기만당할 까닭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었고,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이 인간의 삶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들일 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마당에 더 이상 미혹될 일은 없습니다. 이 믿음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진정한 인간의 삶을 보는 기독교 신앙의 역설적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 믿음은 더 이상 허황된 철학, 허황된 신화와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인간의 삶에 눈길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길이며,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가운데서 일어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길을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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