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3/15 온라인 가정예배] 예수님의 정공법 - 마태복음 8:18~22[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3-14 21:05
조회
18483
2020년 3월 15일 사순절 셋째 주일 온라인 가정예배

시작 오전 11:00 / 인도: 담임목사
피아노: 백수현 장구: 정문자 찬양: 김광식 서윤아 정문자 촬영: 최시내

* 오늘 예배 찬송은 새로 녹음하였습니다. 수고해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 주일 11시 시작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편에 따라 정한 시간에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에의 부름 / 인도자


입례송 / “가서 외치라”(살림의 노래 5) / 다같이


함께 드리는 기도 / / 다같이

하나님,
새봄을 맞이합니다.
움츠렸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고
따스한 봄 햇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린 새싹들이 돋아나오고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생명의 약동을 보고
다시금 하나님의 섭리를 새기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숨결로
뭇 생명이 생기를 얻고 있지만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히려 새로운 희망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숨결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 가운데
오히려 더불어 일상의 평화를 맛보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하여 주시어
그 삶을 회복하기 위하여
마음과 지혜를 모으고 결단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광송/“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새찬송 516)/ 통일찬송265)/다같이


묵상과 성찰 / 마르티니, “사랑의 기쁨” / 다같이


평화의 선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5:13)/인도자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회중기도 / 전홍진 교우


찬양으로 드리는 주의 기도 / “주기도문”(살림의 노래 190) / 다같이


성경말씀 봉독/ 마태복음 8:18~22 / 인도자


말씀나누기/ 예수님의 정공법 / 최형묵 목사


2020년 3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님의 정공법
본문: 마태복음 8:18~22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를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으로 선언하고, 한국에서도 확진자 증가추세가 주춤하기는 해졌지만 여전히 확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금,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격려와 도움, 그리고 희망이 담긴 위로일 것입니다. 여전히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가운데 벌써 세 번째 맞이하고 있는 오늘 주일 예배 가운데서도,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기대일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본문말씀은 그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어찌 그리 단호할까요? 오늘 말씀은, 비정하다고 느껴질 만큼 단호한 예수님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따라서 진정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누가복음(9:57~63)에도 병행구절이 있지만, 조금 더 간결하면서 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마태복음의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는데 율법학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결연한 의지를 표한 사람을 도리어 짐짓 놀라게 만드는 답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사람이 율법학자라고 합니다. 율법학자라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고 그 삶 또한 안정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했고,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당신의 삶을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그래도 따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좋습니다.’ 하는 답입니다. 다소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납득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는 조금 더 심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라.” 여기서 물론 두 번째로 등장하는 ‘죽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뜻한다는 것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도마 11, 51 등 참조).
오늘날 통념으로 봐도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우선합니다. 부모의 장례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의무일 뿐 아니라 나아가 적극적인 선행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그 일보다 우선한다고 잘라 말씀하십니다. 당시 율법과 도덕관념으로는 패륜을 저지른다는 평을 받아 마땅한 태도였습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몰아 부치시는 걸까요?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절박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거두절미하고 사람들이 지금 따라야 할 옳은 길의 절박성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우리 삶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의 그 정공법, 정면돌파 태도가 극적으로 도드라지고 있을 뿐입니다.

말씀의 의미를 다시 헤아려볼까요? 율법학자는 무턱대고 따르겠다고 말했을 리 없습니다. 율법학자는 당대의 율법, 곧 당대의 사회질서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했을 때는 그 자체로 일대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것이 훨씬 극적으로 보일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확인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정말 나를 따르겠습니까? 나의 삶은 이렇습니다. 이와 같은 삶에 거리낌이 없다면 나를 따르시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엇갈리는 양가적인 느낌이 동시에 교차합니다. 한편으로는 고단한 예수님의 삶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결코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람과 같이 사는 삶,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또 한편으로 갈망하는 자유로운 삶을 향한 의지 같은 것입니다. 그 모순된 느낌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 삶에 후회하지 않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와 함께 진정한 자유를 누립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 어떤 거리낌도 없이 현실의 삶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는 새삼 당신의 삶을 그렇게 환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막상 확인하고 보면 놀랄 수도 있는 당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의 의지를 확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존 현실의 삶의 연장선상에서 어떤 보상을 내걺으로써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현실의 삶의 방식과는 다르지만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을 따를 것인지 확인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제자와의 대화는 그 말씀의 진의를 더욱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장례를 치르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주검을 만져서는 안 되는 사제도 친척의 경우에는 예외가 인정될 만큼(레위 21:1~3) 당대 율법의 관념에서 중대사였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매여 있는 율법체제에서도 중대사로 여기는 그 일마저도 뿌리치라는 말씀의 진의, 그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다는 말씀의 진의를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그 일을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의 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헤아려볼 때 아버지를 잃은 제자의 슬픔을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 정황은 가려져 있습니다. 단호한 말씀만 두드러집니다. 율법에서도 중대사로 간주하는 일을 죽은 사람들의 일로 간주하는 태도, 이것은 율법학자의 전향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율법에 매여 있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지 못하고, 그 어떤 체제에 매여 종노릇하는 삶, 그 삶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이 살아가는 삶은 곧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알고 나의 나됨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저항하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은 그렇게 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저 주어진 체제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고 해서 생각없이 따르는 것이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진정으로 살 길을 따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삶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단호하게 구별합니다. 우물쭈물 할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해야만 했을까요?
우리의 삶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악한 것과 선한 것은 선명하게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잘라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투명하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위력을 지닐 수 없습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그른 것과 옳은 것 사이에서 엉켜 살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해 진정한 구원의 길을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이야기(8:23~27)는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혼란 가운데 허둥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예수님께서 중심을 잡고 그 사태를 진정시켰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말씀의 뜻과 직결됩니다.

오늘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적자생존, 각자도생의 원리입니다. 무한한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의 체제가 보장해주는 삶을 누리기 위해 바둥댑니다. 그 기준에 부합하는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실상입니다.
교회는 그 세상 한복판에서 참 생명의 길을 실현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교회가 오히려 한 술 더 뜨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들만 구원의 무리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세상의 질서와 가치관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오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천지는 그 교회 안에서 배태되었고, 그렇게 유지되는 세상과 교회를 더욱 압축하여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신천지 신도들이 가족마저 버리고 충성을 바친 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생명의 길, 자유의 길을 따르는 것과 결코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에 포로된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이만희의 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갈수록 노예가 될 뿐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의 실상, 죽음과 다르지 않은 삶의 실상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진정으로 삶을 삶답게 누리는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여전히 우리가 헤어 나오지 못한 코로나19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정치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또는 올림픽이라는 중대사를 치러야 한다는 이유로 그 실상을 은폐ㆍ축소하거나 엉뚱한 트집을 잡아 책임 전가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질병의 실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힘과 지혜를 모으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태의 실상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습니다. 확진자가 늘어 두렵고, 그렇게 늘어나 병실부족으로 혼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는 길인지 점점 분명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혼란한 세상 가운데서 무엇이 참 생명을 보장하는 길인지 끊임없이 찾고 그 길을 따르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 나선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기며 그 삶을 스스로 누리고 세상에 펼쳐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각기 가정에서 형편대로 정성을 모읍니다.

봉헌송/ “작은 불꽃 하나가”(살림의 노래 183) / 다같이


봉헌기도 / 인도자


* 봉헌기도 후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결단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결단송 / “산 밑으로 내려가자”(살림의 노래 112) / 다같이


축복기도 /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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