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따로 또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기 - 갈라디아서 3:26-28[정용택 목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0-07-19 21:02
조회
36413
2020년 7월 19일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제목: 따로 또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기

본문: 갈라디아서 3:26~28

정용택 목사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28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1. 율법의 행위 대() 그리스도의 신실함

오늘 집중적으로 살펴볼 갈라디아서 3장 26-28절 본문의 전제가 되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자면,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이 본문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대 율법을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메시아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정의롭게 되었다고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는 어떤 피조물도 정의롭다는 선고를 받을 수 없습니다”(N. T. Wright).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것, 즉 부정의한 것들을 바로 잡아서 정의를 실현하는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통로 가운데 하나로 먼저 율법의 행위들을, 그리고 다른 하나로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하심을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를 포함하여 이 세계를 의롭게 하심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고, 또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과 로마서 3장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은 일종의 정체성 표지(identity marker)에 의존하는 유대인에 대한 언급으로 간주됩니다. 특히 얼마 전에 타계한 제임스 던(James D.G. Dunn)이라는 영국의 신약학자에 따르면, 예수와 바울이 살았던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율법의 행위는 할례나 음식법처럼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분시켜주는 일종의 정체성 표지이자 경계표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이래로 개신교에서 상식처럼 공유되어온 전통적인 유대교 이해, 즉 유대교를 루터 당시의 가톨릭교회처럼 공로주의 종교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유일하신) 하느님에 의해 그의 백성이 되도록 특별히 선택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특수성에 대한 기본적 표현”, “사회학적 용어로 … 이스라엘의 특수성의 인식을 강화하고 주변 민족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분하는 경계표식으로서 기능”했을 뿐입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말로 표현했을까요?

물론 할례를 유대인들만 시행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이 유대인을 하나의 종족으로서 다른 종족들과 뚜렷하게 구별짓는 행동양식으로 널리 간주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요컨대, 한편으로 할례나 음식법 같은 특정한 율법의 준수로 이해되는, 즉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 열심을 위한 구별짓기의 장치로 기능했던 ‘율법의 행위들’(ergon nomou)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피스티스 크리스투(pistis Christou), 즉 메시아 예수의 하느님 앞에서의 신실한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전자가 아브라함의 후손, 언약의 백성이라는 특권적인 신분과 유대인으로서의 종족적 정체성을 규정짓는 특정한 율법의 규율들을 준수함으로써, 결국 유대인이라는 집단 정체성을 공유함으로써 인간이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면, 후자는 메시아 예수 안에서 행하신 하느님의 주도적 행위를 통해 인간 자신의 그 어떤 주관적 믿음이나 실천이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전적인 은혜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이 두 가지 구원의 길 가운데서 바울 자신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물론 후자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2. 메시아 안에서 하나 된 세계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제 갈라디아서 3장 26-2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3장 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율법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지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계약 안에 있는 율법의 행위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과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3장 27절의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인들이 세례받을 때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불렸던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당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너희는 마치 그가 너희의 옷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이다.” 메시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메시아를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령, 로마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라고 명확히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특성,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목적을 취하여 말 그대로 그분과 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우리들 모두가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서 옷 입음의 은유는 매우 특별한 종류의 변화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컨대, 데살로니가전서 5:8-10, 고린도전서 15:53-54, 로마서 13:12절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로 하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쓴다”거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할 때, 그는 언제나 이러한 옷 입음의 은유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묵시적 전쟁, 종말론적 투쟁, 시간의 종말을 향한 투쟁의 긴장 가운데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섭니다.

3장 28절에 이르러 바울은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종교적 정체성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님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노예도 자유인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는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계의 실현을 단순히 교회 안에서의 관계에 대한 종교적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3:26-28절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례의식에서 사용되던 일종의 신앙고백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 하에 3장 28절의 이러한 완전한 평등과 통일의 선언은 그저 교회 안에서 성별과 계급과 인종의 차이를 넘어 신앙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협력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는 ‘좋은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미 현실의 교회 안에서도 무수한 차별과 불평등과 위계와 지배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해석은 그야말로 기만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울의 선언은 그런 피상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훨씬 뛰어넘는 결정적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사건 또는 구원사건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노예상태 및 예속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앞서 말씀드렸듯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정의롭게 하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정의롭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둘러싼 억압과 지배를 깨뜨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구원의 근거가 율법의 행위들로 상징되는 특정한 정체성의 표지도 아니고, 더 나아가 인간의 편에서 믿음도 아니라는 사실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모든 구원사건, 세계를 정의롭게 바로잡는 하느님의 행동은 인간의 어떠한 협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자면, 이 세계에는 더 이상 인간과 인간을 가르는 그 어떤 차별의 기준, 배제의 표지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구별짓기에 기초한 대립관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하는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새로운 삶의 양식 및 가치형태에 비추어 본다면, 이 세계 안에서 인간과 인간을 나누는 것, 더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모든 것들이 무효화되었습니다. 이 대립쌍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바로 세계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J. Louis Martyn). 갈라디아서 3:22-24절에서 바울은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한 약속이 오기 전까지,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율법은 정확히는 율법의 행위들을 가리키며, 이는 구원을 얻기 위한 도덕적 계율 같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정체성 표지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그 얘기인즉슨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 정의로워진 세계는 율법의 행위들과 같은 정체성 표지에 의해 갈라지고 찢겨진 세계를 바로잡은 세계라는 말입니다.

물론 현실에선 수많은 정체성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계급, 젠더, 인종, 민족성, 섹슈얼리티, 성적 지향, 국적, 지위, 정치적, 종교적 입장 등에 따라서 정체성의 목록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들의 무한한 다양성과 얽혀 있는 수많은 차별과 배제, 혐오와 적대, 위계와 지배 역시 엄연히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우리 교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저도 알고 여러분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분명한 차이들을 무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미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는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이나 개성들을 모조리 부정하고 기독교인 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으로 모두가 획일적으로 환원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각자의 사회적 정체성들은 교회 올 때는 잠시 집에 놔두었다가 교회 안에선 기독교인, 또는 성도(聖徒)라는 정체성만 가지고서 일시적으로 잠깐 하나가 되었다가 만다는 그런 의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시, 자기 자신을 정의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정체성들, 역할들, 지위들, 관계들의 명단을 작성한다고 가정해보지요. 이 명단을 얼마나 길게 늘이든 간에 언제나 거기에 더 추가되어야 할 무엇인가가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 느낌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내 주변에서 나를 부르는 많은 이름들, 내가 생각하기에 나를 정의해주는 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로도 나를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는 불길한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언제나 나의 상징적 정체성, 역할 따위를 초과하는 것이 바로 나이며, 언제나 상징화/정체화/사회화에 저항하는 내 안의 어떤 딱딱한 이물질 같은 것이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간극, 이러한 불일치, 이러한 공백, 이러한 잉여가 바로 진짜 ‘나’ 아닐까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으로 상징되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의 표지들이 결국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제 아무리 확고한 사회적 정체성의 표지들을 가진다고 해도 나는 그 어떤 것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존재의 진실’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정체성, 역할, 지위, 계급, 성별, 인종, 신분 등을 초과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 만물이 주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 불일치, 그 분열, 그 간극, 그 잉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3. 우리는 모두 똥 덩어리에 불과하다

2000년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반복되어온 중요한 논쟁이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를 통해 재현된 바 있습니다. 네덜란드 태생의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이미 당대를 대표하는 인문주의자로서 명성을 떨쳤고,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 멜랑히톤, 츠빙글리, 칼뱅 등과 동시대를 살면서 그들이 개혁적인 사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0일 역사적인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본격적인 신호탄을 터뜨렸을 무렵에만 해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고 각자의 기여를 인정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 점점 신학적 이견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524년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에 관하여』(De Libero Arbitrio, Diatribe seu Collatio)를 출간하자 루터가 다음해 『노예의지에 관하여』(De Servo Arbitrio)를 발표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됩니다. 둘 간의 쟁점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데 어떻게 작용하는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인문주의자(humanist)인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천부적인 선함과 존엄성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은혜 없이도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에 참여하는 인간의 선택과 능력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반면에, 루터는 ‘자유의지’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인간의 의지가 노예상태(‘노예의지’)에 있다는 점을 근거로 구원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보기에 루터는 인간의 자율적인 능력과 의지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흡사 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루터처럼 구원의 철저한 타율성을 강조하게 되면 인간의 자율성, 자유의지, 능력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당대의 시대정신이었던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기치에도 역행한다는 점에서 루터식의 종교개혁은 ‘야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반대로 루터가 보기에는 오히려 인간의 합리적 이성 및 자유의지를 가지고 구원의 자율성을 긍정하는 에라스무스야말로 바울이 주장했던 구원의 타율성, 즉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중세의 암흑기를 벗어나 새롭게 재발견된 성서의 그 진리를 부정하고 다시금 행위구원론으로 돌아가려는 낡은 ‘이단’의 대변자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에라스무스에 동조하는 당대의 인문주의자들을 싸잡아서, 아니 사실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어떤 기여를 내세워 구원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모든 사고방식을 겨냥하여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당신들은 악마의 항문으로부터 세상에 떨어진 오물(waste matter, excrement)이다(Jacques Lacan). 그는 인간이 이런 자기인식 없이는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도, 어떠한 새로운 주체의 출현도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먼저 자신이 존재론적으로 악마가 똥구멍으로 싸지른 배설물, 즉 ‘똥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할 때 비로소 구원을 갈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지금도 매우 과격한 반(反)인간주의자(anti-humanist)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에라스무스와 루터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봤듯이, 적어도 바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은 에라스무스처럼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칭송한 르네상스 휴머니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악마의 항문으로부터 세상에 떨어진 오물, 배설물, 똥 덩어리라는 루터의 반인간주의에서 오롯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어느 현대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 주체가 스스로를 탈구된것으로서, 사물들의 질서로부터, 존재자들의 실정적 질서로부터 배제된 것으로서 지각할 때 비로소 출현하기 때문입니다(Slavoj Žižek). 그러므로 주체의 실정적-실체적 존재를 처분가능한 똥 덩어리piece of shit’로 환원시킴 없이는 어떠한 주체성도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주체 개념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됨을 얻는 새로운 그리스도인 주체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실존적 차원에서 우리들 자신이 처분가능한 배설물, 무가치한 오물,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똥 덩어리,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는 철저한 자기부정의 인식에 도달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만 할까요?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본래 하느님 자신이었던 예수가 죄인들이라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되었고, 바로 그곳에서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러한 삶의 종착점에서 마침내 십자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 2:6-8). 다시 말해, 복음의 주체인 나사렛 예수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지상에서의 모든 삶의 궤적을 통해 자발적으로 당시 사회에서 그 존재를 부정당하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동일한 절대자였던 예수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메시아가 되었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선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과 같이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야만 우리에게 하느님의 의롭게 하시는 사건은 그 실제적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 1:28-29).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유대교라는 정체성을 대체한 새로운 정체성으로서의 기독교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하신 삶과 죽음, 말씀과 행동으로 포괄되는 이른바 예수사건으로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모든 측면들, 정체성, 역할, 지위, 계급, 성별, 인종, 신분 등등,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느님 앞에서 내려놓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세계 전체를 정의롭게 바로잡았다고, 어느 날 느닷없이 하느님이 선언해버렸습니다. 이 선언을 실효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그 실제적 효과가 우리의 삶 속에, 이 세계 속에 나타나도록 만드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가 은혜로 의롭게 됨을 얻은 것에 합당한 자로서 응답했을 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이 주도적인 행위 역시 소급하여 적절했던 것이 됩니다. 단,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들’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가운데서, 스스로를 ‘아무 것도 아닌 것들’로 적극적으로 주체화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행동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 노예도 자유인도 … ‘남자와 여자’도 …”,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과 지위와 관계도, 나를 나로 온전히 정의 내려줄 수 없다는 율법의 진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그러나 동시에 진짜 ‘나’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우리들 각자가 그리스도 앞에 동시에 나아갈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쫓아서 스스로를 철저하게 ‘비우는 것’, 자신의 존재와 삶을 그리스도 앞에서 빈 터로 만들어 나가십시오. 그럴 때 역설적이게도 그 빈 터를 채울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따로 또 같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발견을 우리는 ‘연대’(solidarity)라고 부릅니다. 연대는 정체성의 획일적인 통합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빈 터와 마주하게 하는 사건에 우리가 ‘따로 또 같이’ 참여함으로써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연대의 실현을 또한 그리스도사건/구원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사건/구원사건을 지금 여기에서 ‘따로 또 같이’ 경험해나가는, 그리고 우리가 함께 경험한 그 사건을 세상에 증언하며, 그 차별 없는 연대의 세계로 우리의 이웃들을 초대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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