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편견을 넘어서 - 요한복음 9:1~7[동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8-02 16:41
조회
32378
2020년 8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편견을 넘어서
본문: 요한복음 9:1~7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 물음은 당시로서는 명백한 하나의 세계관, 가치관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 아니 대개 전근대 사람들은 인간의 질병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질병이나 장애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상식에서 병자나 장애인은 동시에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육체적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은 그렇게 징벌을 받을 만한 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동시에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도 고통 받고 소외되었습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공통적으로 질병과 장애를 가진 사람은 사회와 격리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강제적으로 제거하는 야만의 역사도 있습니다. 교회 역시 그와 같은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20세기 들어서서야 비로소 인류는 보편적 인권 개념에 입각해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지만, 오늘날이라고 해서 전근대적인 편견이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닙니다. 소위 능력 있는 사람은 뭔가 그럴 만한 자질을 애초부터 갖추고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뭔가 처음부터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상식은, 질병이나 장애가 죄의 결과라는 과거의 편견이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이 된 사연이 누구 탓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은 바로 그런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사실 당시로서는 특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질문입니다. 그런 편견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죄 때문에 그런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것이 부모의 죄 탓이냐, 아니면 자신의 죄 탓이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면 어머니 뱃속에서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질병이나 장애가 죄의 결과라는 편견은 그렇게 얼토당토 않는 물음까지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만듭니다. 한마디로 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처지는 안중에 없습니다. 질병과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따라서 그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환자이기 이전에 죄인으로 봅니다. 질병을 안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보기 이전에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질렀을까 생각합니다. 고통에 대한 공감 이전에 정죄부터 합니다.

그 편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유다인들의 편견, 고정관념을 깨고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을 해야 하는 물음 앞에서, 그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피함으로써 그 물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려버립니다. ‘쓰잘 데 없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답변방식은 사실 예수님께서 늘 쓰시는 방식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일축해버리면서 문제의 초점을 다른 차원으로 돌리는 방식입니다. 예수께서는 터무니없는 사회적ㆍ종교적 편견을 그렇게 일축하고 계십니다. 장애가 어째서 죄의 결과냐고 일축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은 더 이상 장황하게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얼토당토 않는 물음에는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시면서, 그 장애의 의미를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안겨주셨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 장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겪고 있는 장애로 인해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봐라, 이 사람이 겪고 있는 장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의미는, 그 장애를 겪는 사람에게 지금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고 그 사람이 겪고 있는 불편과 고통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곧바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앞을 볼 수 있도록 치유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침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서 씻게 함으로써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지금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얼토당토 않는 편견에서 비롯된 정죄가 아니라 그에게 다가서는 것이며 그가 장애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두 번째 의미는, 지금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질병과 장애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의 불편과 고통은 안중에 없고 자신들이 의롭고 완전하다는 데 자족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은 죄인이요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의 불편과 고통은 자신들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불편과 고통을 겪는 사람을 주목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 사람을 주목하는 것은 곧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뭔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모든 사람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불완전한 비정상인이요,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한 정상인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장애를 겪는 사람을 주목함으로써 그 상식을 파기하도록 일깨우십니다.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생각하고 의롭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장애인은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거울이요 빛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나 불편한 상황에 처하고 누구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깨달아야 새로운 삶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구원의 현실에 다가섭니다. 자신이 잘 났기에, 자신은 완전하기에, 자신은 죄가 없기에 불편함 없이 살아간다고만 생각하면 새로운 삶의 관계 그 구원의 현실은 맛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눈 먼 사람이 눈 뜬 사건을 인정하지 않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두고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눈 먼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9:39 이하). 불편함과 고통스러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곧 자신에 대한 배려일 수 있다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주인공 눈 먼 장애인은 사람들에게 그 배려를 일깨우고 독려하는 거울이요 빛입니다. 그는 그렇게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 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 사건의 주인공을 둘러싸고, 모세의 전통을 고집하는 유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낡은 편견과 하나님을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전망이 갈등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13절 이하).
그리고 이어 극적인 대비 가운데 이야기는 결론에 이릅니다. 장님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은 갈등과 대결의 위기를 벗어나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한 믿음의 경지에 이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전복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눈이 멀었지만 새로 눈을 뜬 사람과,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마땅히 보는 사람과, 그 앞에서도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대비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떨친 사람과 여전히 그 편견을 고집하는 사람의 대비입니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 있었던 사람에게 빛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이 세계의 전부인양 착각하는 사람에게 빛은 혼란이며 재앙입니다. 낡은 편견을 벗어 던진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낡은 편견을 고수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는 혼란이며 불안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 이야기 자체가 예수님의 초능력을 과시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로 인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 극적으로 그 고통에서 해방된 이 사건은, 그 고통을 야기하는 세간의 편견을 무력화함으로써 오히려 눈 뜨고도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장애는 그 자체로 고통이기보다는 장애로 간주되는 그 현상에 대해 편견으로 대하는 사회적 시선, 그리고 그것을 예외적인 어떤 것으로 돌려버리는 사회적 질서로 인해 고통이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예수님의 기적 사건은, 바로 그 사회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근본적인 초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온갖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그 편견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합니다.

현대의학이 장애나 질병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향한 편견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지난 주간 한 일간지와 인터뷰를 했고 그 기사는 간결하게 나왔지만(한국일보, 7.31), 사실은 두 시간에 이르도록 긴 이야기를 기자와 나눴습니다. 기자의 물음 가운데, 그걸 인정하면 전통적인 신앙의 입장에서 혼란이 생기지 않느냐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성서를 근거로 하여 성차별을 정당화하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또한 장애가 있는 사람은 사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왔지만, 오늘날 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느냐 답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물으면 답이 나오지 않겠느냐 이야기했습니다.
혼란과 진통을 겪을 수 있지만, 그 혼란과 진통을 겪고 나면 오히려 신앙이 깊어지고, 세계관이 확장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은 가장 훌륭한 헌법으로 간주됩니다. 지독한 인종차별주의를 끝내고, 1996년 제정한 헌법은 다양성 속에서 하나 됨을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요건을 촘촘히 규정하여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규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헌법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내다 지난해 은퇴한 동성애 판사 애드윈 캐머런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나는 동성애자이고 싶지 않았다. 낙인이 찍히고 고립되고 욕을 먹는, 성정체성이 다른 부끄러운 소수자, 그 행동이 너무 경멸스럽고 죄 많고 부도덕해서 범죄로 간주되었던 그런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맹세했다. 내가 정말 동성애자라면, 자살하리라. 이후 다행히도, 나는 신중하게 그 최종 결정을 미루곤 했다.”(박홍규, 한겨레신문, 8.1.)
덕분에 그는 자신의 사회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온갖 이유로 차별을 겪는 일이 끊이지 않은 모든 사회를 위해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아닐까요?

성서는 사실 하나님에 의해 끊임없이 인간의 편견이 무너지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편견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요? 성서의 대의에 비추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또한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촉구하고 계시는 그 뜻에 비추어보면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진실을 깨달아 진실을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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