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하나 마나 한 아베 담화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5-09-02 00:16
조회
1462
* 『福音と 世界』원고


하나 마나 한 아베 담화


최형묵


아베 수상의 담화는 발표되기 이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기본적으로 그 관심은 종전 70주년이 갖는 무게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베 총리의 담화에 대한 관심은 이른바 수정주의적 역사 이해에 근거하여 근래 일본 정부의 담화내용을 크게 수정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93년 고노(河野洋平) 담화, 1995년 무라야마(村山富市) 담화, 1998년 김대중(金大中)ㆍ오부치(小淵惠三)의 공동선언, 그리고 2010년 간(管直人)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과 관련하여 그 주체와 책임, 그리고 그 피해의 대상을 분명히 하는 역사인식의 발전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런 만큼 그 일련의 담화들은 주변국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동아시아지역의 평화체제 확립을 위한 역사 인식의 기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아베 총리가 그 담화의 내용들을 수정하겠다고 했을 때 우려가 제기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천만다행일까? 지난 8월 14일 발표된 아베 총리의 담화는 일단 기왕의 담화 내용들을 수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침략과 전쟁, 식민지 지배, 그리고 반성과 사죄의 개념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역대 내각의 입장에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한일간의 주요 현안이 되고 있고 나아가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있는 ‘종군 위안부’와 관련하여 “전쟁중 많은 여성들의 존엄과 명예가 깊은 상처를 입은” 사실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번 담화가 구사하고 있는 표면상의 언어들을 볼 것 같으면 담화 자체가 표방하고 있듯이 기왕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수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아베 총리가 사전에 제기된 여러 우려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은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표면상의 언어에도 불구하고 장황한 이번 담화의 논리구조를 들여다볼 것 같으면, 과연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보인다. 그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지적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역사 인식의 차원이요, 두 번째는 과거 역사에서 비롯되는 현실에 대한 책임의 차원이다.


러일 전쟁이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을 고무시켰다는 주장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전쟁의 결과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그 엄연한 역사적 인과관계를 무시한 채 마치 일본이 서구 백인의 세계로부터 유색인의 세계를 지켜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인종주의적 환상에 기댄 시대착오적인 인식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담화의 초반 문맥을 보면, 그 때까지는 좋았으나 만주사변과 국제연맹의 탈퇴 등으로 국제사회의 도전자가 되어버린 그 시점부터 일본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는 인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전쟁의 시기만을 문제 삼고 있을 뿐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역사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지 시기의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인식은 이 담화의 저변동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반성과 사죄의 언어가 정말 진정성이 있는지 충분히 의심할 만한 근거가 되고 있다.


다음으로 이번 담화는 반성과 사죄의 개념이 반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적 주체를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지 않다. 과거 한 때 불행한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런 불행한 일이 없어야겠다고 말하는 것일 뿐,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피해를 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입장의 천명은 없다. 이러한 논법에서 불철저한 전후 처리와 함께 지속되어 온 이른바 무책임의 구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단순한 기시감(旣視感, Déjà Vu)은 아니다. 역대 내각의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일본 정부의 책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기는 하지만, 정작 이 담화를 발표하는 아베 정부의 책임 있는 입장 표명은 없다. 바로 그 점에서 현재의 아베 정부가 과거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책임 있게 마주하려고 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번 아베의 담화는 말로는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번 담화를 통해 아베 총리는 자신의 평소 주장을 매우 절묘하게 펼치고 있을 뿐 식민지와 전쟁의 피해 당사자에게는 정작 아무런 책임 있는 입장도 표명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종전 70주년이 주는 무게감을 생각할 때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더욱이 후세대에게 사과라는 숙명을 안겨주기를 원치 않았다면 이번 담화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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