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평화에의 선택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11-24 21:38
조회
724
京都教区「教会と社会」特設委員会 在日・日韓連帯小委員会 社会セミナー講演
주제:緊迫する東北アジアの情勢と平和の模索 - 韓国における平和運動と市民の対話
2017년 11월 21일(화) 오후 6:30 / 京都 洛南教会

東北アジアの緊張と平和への選択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평화에의 선택

崔亨黙

1. 동북아시아 긴장고조와 한ㆍ일간의 비대칭적 관계?

한국사회는 지난 2016년 10월 시작되어 올해 2017년초까지 지속된 촛불항쟁을 통해 정권을 교체하고, 보다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과정 가운데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촛불항쟁으로 탄생한 현재 문재인 정부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성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 90%가 넘는 지지율이 몇 달이 지난 지금 70%대로 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실은 현재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강연을 준비할 즈음인 지난 10월 22일 일본에서는 총선이 있었고, 그 결과는 아베 수상이 이끄는 자민당의 압도적 승리였다. 이제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헌법을 개정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미 전에도 개헌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헌을 반대하는 국민여론과 현재 아베 내각에 대한 낮은 지지율 탓에 개헌을 할 수 없었던 사정을 생각하면, 이번 총선 결과가 꼭 개헌으로 귀결되리라 예견할 수는 없지만, 그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은 사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낮아진 것도, 일본의 아베 수상이 이끄는 자민당의 의석수가 늘어난 것도 모두 동일한 안보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북핵’ 문제로 인한 동북아시아의 긴장고조 상황이 양국 정부 지지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상당한 폭으로 지지율 하락을 겪은 것은, 대북관계에서 평화적 접근을 천명했고 그렇게 기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면 미국의 강경대응 정책에 동조하며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는 등의 조치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아베 정부가 개헌가능 의석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것은 ‘북핵’에 대응하여 안보위기를 조장하고 그에 따른 불안심리 정서에 편승한 탓이다. 물론 일본의 야당세력이 지리멸렬한 상황도 그 요인 가운데 하나이지만, 북핵문제로 인한 안보위기 논리가 중요한 요인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렇게 엇갈리는 양국 사이의 현상을 보면, 동북아시아의 역학구도 가운데 나타나는 한일간의 비대칭적 관계가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비대칭적 관계란, 냉전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한국은 냉전의 최전방으로서 군사독재가 자리한 반면 일본은 평화주의를 구가하였는데, 냉전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한국에서 민주화가 진전되었을 때 일본이 군사주의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냉전체제가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한반도의 분단이 지속되고 있고, 특별히 최근 북핵을 둘러싼 긴장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한국 정부가 평화적 접근을 강조하는 반면 일본 정부는 그 긴장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비대칭적 관계가 재현되는 듯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그와 같은 현상을 야기하는 핵심 요인으로 간주되는 ‘북핵’ 문제의 실상은 무엇일까? 과연 평화적 접근방법은 국제관계 안에서 실효성을 지니기 어려운 것일까? 결국 국가간의 갈등은 필연적이고, 그렇게 갈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각 사회 안에서 배외주의가 강화되는 현상 또한 불가피한 것일까? 이 강연은 이와 같은 물음들을 유념하며, 평화적 접근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는 가운데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양국 시민사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모색하고자 한다.

2. 동북아시아 긴장격화의 요인과 현상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한반도의 남북이 분단된 이래 동북아시아의 긴장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남북은 1950년부터 3년간의 전쟁을 겪기도 하였고, 휴전 이후 냉전체제하에서 팽팽한 긴장을 계속해왔다.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에도 남북관계는 일종의 냉전의 섬으로서 긴장을 계속 유지한 채로 있다. 동북아시아는 그 남북의 대립에 더하여 한ㆍ중ㆍ일 삼국간에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이른바 G2로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 접점지역으로서 긴장강화 요인을 안고 있다. ‘동아시아 패러독스’라는 말이 시사하듯, 특히 동북아시아는 경제적으로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ㆍ군사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으며 아직 이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북핵’ 문제는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최대의 요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계속된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발사 그 일련의 과정을 보면, 북한은 주변국과 세계 여론에 상관없이 자기고집대로 행동해온 통제불능의 국가요, 비이성적인 국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미 미국의 <뉴욕타임즈> 및 세계의 몇몇 언론이 냉정하게 평가한 바와 같이 북한은 자신의 체제 유지와 생존을 위한 지극히 ‘이성적인’ 국가전략을 추진하고 있을 뿐이라는 평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서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이 평가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북한이 현재와 같은 핵 능력을 보유하게 된 상황이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른바 ‘북핵’ 문제는 국제적 역학관계 안에서 발생한, 다시 말해 국가간 상호관계 안에서 발생한 문제이지 단지 북한의 비이성적 국가전략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문제가 부상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북한이 1990년대 초반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이 되자 심한 체제불안을 느끼면서 이후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되는 북한의 요구사항은 평화협정 체결, 체제 안전보장, 경제제재 해제로 집약된다.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독일 통일 이후 북한은 무엇보다도 체제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1992년 북한은 미국의 부시 정부에 수교를 요청하였지만 무시당하자 클린턴 정부 초기에 핵 카드를 들고 나왔다. 클린턴 정부와 한국의 김영삼 정부가 이에 대해 제재의 입장을 취하자 북한은 오히려 NPT탈퇴로 대응했고, 그래도 대화의 필요성을 말하면서도 정작 응하지 않는 미국의 태도, 그리고 한국의 강경한 태도가 계속되자 북한은 노동1호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초강수 대응을 한다. 그때서야 미국은 대화에 응했고, 1994년 10월 마침내 제네바에서 기본 합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제네바 협의에 따른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북ㆍ미 수교도 진전이 없는데다가 미국으로부터 북한 붕괴설이 나돌자 북한은 1998년 8월말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다.  미국과 일본의 여론은 나빠졌고, 한국의 여론 또한 좋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김대중 정부가 ‘햇볕 정책’의 맥락에서 중재 역할을 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의 설득으로 미국의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에 의한 페리 프로세스가 제안되었다. 그 내용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면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수교를 추진하고,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해서 국제안보 차원에서 불안감 없이 살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냉전체제를 해체하는 것으로서 제네바 협의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이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도 그런 조건에서 성사되었다.
그런데 2001년 아들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태는 다시 악화되었다. 부시 정부가 북ㆍ미간 과거 합의를 뒤집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핵 실험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의 성능을 향상시켰다. 그 와중에 미국은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2005년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에 합의했지만, 실제로 진전된 것은 없었다.
이후 미국 오바마 정부하에서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오바마 정부는 “도발에 보상하는 정책을 안 한다.”고 선언하고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정책을 지속해 왔다. 게다가 한국의 이명박 정부 또한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북한의 태도 변화만을 요구했을 뿐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한국의 민주 정부에 의한 남북관계의 주도적 역할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사태는 더욱 나빠졌다. 자신들의 요구는 무시당하고 국제적 압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북한은 군사력도 강화했고, 경제적으로 반등의 기회를 만들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내부체제를 공고화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으로의 권력이양과 노동당 및 국가기구의 정상화를 그 나름대로 이뤄냈다. ‘전략적 인내’가 지속되는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 능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2013년초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권이 등장하여 안보와 협력의 균형을 맞추는 ‘신뢰 프로세스’를 대북정책으로 내세웠지만, 대북관계에서 신뢰는커녕 불신을 더욱 심화시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개성공단 철수로 남북관계에서 불신이 더욱 깊어졌고, 사드배치로 중국과의 관계마저 악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이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보여주듯 북한의 미사일과 핵 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2017년 미국의 트럼프 정부의 등장과 촛불항쟁으로 인한 한국의 문재인 정부의 등장으로 남북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트럼프 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전략적 인내’ 정책과는 달리 북핵문제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을 모색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평화적 접근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하지만 조만간 다가올  대화국면에서 보다 유리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 탓인지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로 인해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말 폭탄’은 위험수위를 넘기고 있고, 긴장이 그렇게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의 아베 정권은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그 가운데서 한국의 문재인 정부의 평화적 접근은 아직까지 국면전환에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하여 중국과의 갈등관계를 봉합할 수 있는 정책적 입장을 분명히 하는가 하면 북한과 관련하여 한반도 평화 원칙을 천명하였다. 지난 10월 30일 외교부장관 발언을 통하여 사드 추가 배치하지 않는다,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ㆍ미ㆍ일 군사동맹하지 않는다는 3불 원칙을 천명하였다. 한편 지난 11월 1일 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한반도 평화 5대 원칙을 천명하였다. 한반도 평화정착, 한반도 비핵화, 남북문제 주도적 해결, 북핵 평화적 해결, 북 도발엔 단호한 대응이 그것이다. 여기서 다섯 번째 원칙은 앞의 네 가지 원칙이 견지한 평화적 접근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평화적 원칙이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북한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입장이 바뀌지 않은데다가 남한 정부 역시 아직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현재 상태에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예견되고 있고, 따라서 동북아시아의 긴장고조 상태는 아직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3. 극한의 대결을 넘어선 평화의 가능성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요원한 것일까? 한반도에서의 극한적 대결은 동북아시아 평화가 파괴되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파국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적어도 국가간 이성적 판단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다면, 극한의 군사적 대결로서 전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극한의 군사적 대결로 치닫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의 상태가 지속된다면 북한의 핵 능력이 더욱 강화된 조건하에서 ‘공포의 균형’만 남게 된다. 그것은 평화로운 일상의 삶의 포기를 뜻한다. 그것은 남북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끊임없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는 경우나 최근 일본사회에서의 유사한 현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긴장과 대치 상태를 풀 수 있는 해법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
적어도 직접적인 대치상황 가운데 있는 남북관계에 한정해 말하면, 평화적 해결의 접점을 찾는 것이 그렇게 난망해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남북 사회는 모두 의미있는 변화의 과정 가운데 있다.
한국사회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촛불항쟁으로 새 정부가 등장하여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이루기 위한 과정 가운데 있고, 또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일관되게 평화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정부가 물려준 적폐 탓에 현 시점의 동북아시아의 국제적 관계 안에서 적극적 조정자로서 역할이 제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동맹관계 안에서 운신의 폭이 제한되고 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대화상대로서 북한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미국의 압박을 배경으로 하여 긴밀한 관계 형성을 요청받고 있지만, 이전 정부의 잘못된 ‘위안부’ 합의로 갈등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대북정책에 대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사드배치 문제로 심각한 갈등의 상황에 처해 있다가 최근에야 겨우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 한국의 새 정부로서는 결코 녹록치 않은 국제적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평화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기대할 만하며 그 입장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 성패는 현 정부가 한미동맹관계에 기우느냐 아니면 촛불항쟁으로 드러난 민의에 충실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북한사회 또한 여러 소식통을 참고하여 볼 때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선 북한의 일관된 입장을 재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핵 개발을 시도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평화체제의 구축을 통한 체제안정에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체제안전보장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구책으로 핵 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간 미국이 제재와 압박 정책으로 일관해온 이유는 조만간 북한의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 가정한 데 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북한의 체제는 붕괴하지 않고 지속되는 가운데 ‘경제ㆍ핵 병진’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바깥의 시선에서 볼 때 바로 그 점이 비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북한이 그와 같은 병진 노선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대개 북한이 고도로 군사화되어 있는 국가로 상상하지만, 사실상 핵 개발 이외 기존 무기체계는 낙후되어 있으며 북한의 병사 대부분은 경제활동에 투입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핵 개발이 사실상 최소의 비용으로 스스로의 안보를 지키는 방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 북한사회에는 현재 광범위하게 ‘장마당’이 형성되어 있어 모든 생활필수품이 거래되고 있다. 북한사회가 사실상 국가적 배급체제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북한 당국이 인민의 생활을 책임져야 할 부담에서 자유로워져 체제안보를 효과적으로 하는 데 매진할 수 있는 조건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 북한의 ‘경제ㆍ핵 병진’ 노선은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비상수단일 뿐이지, 항구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북한은 끊임없이 평화체제의 확립과 체제 안전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기만이 아니라 절실한 요구이다. 그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북한사회는 이미 급격히 변화할 수밖에 없는 조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미 국가적 배급체제가 붕괴되고 시장거래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점은, 외부로부터 봉쇄와 제재가 해제되었을 때 북한사회를 급격히 변화시킬 조건이 되는 것이다. 북한은 그 조건하에서 훨씬 개방적인 체제로 전환할 수 있고, 국제적 질서 가운데서  정상적인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시아는 훨씬 평화로워질 것이고, 그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평화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지금 다각도로 그 평화적 해법이 제안되고 있다. 그 해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국가적ㆍ시민적 역량을 모아야 할 때이다. 국가간 불안정한 긴장을 제거하고 평화를 이루는 것은, 단지 국가간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각기 사회 안에서 배외주의 및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조장하는 거시적 배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각기 사회 안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국가간, 국제적 차원의 평화는 반드시 요청된다.

4. ‘로마의 평화’ㆍ‘아메리카의 평화’에 맞서는 ‘그리스도의 평화’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선언에 근거하여 이 땅에 평화를 이루는 것을 기본적인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을 선포한다.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 선언은 세상의 질서 곧 ‘로마의 평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로마의 평화’는 힘의 우위를 전제로 하는 평화이며, 오늘날 ‘아메리카의 평화’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바로 그 ‘로마의 평화’를 깨트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들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 목적뿐 아니라, 그 과정과 수단까지도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다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에 이어 나오는 보복금지에 관한 가르침에서 분명히 제시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이 가르침은, 적의를 가진 상대에 동일한 적의로 맞대응해서는 그걸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 적의를 무력화시킬 행동을 취할 때 근본적으로 그 적의를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철저하게 상대의 입장에 설 뿐 아니라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감으로써 결국 상대의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의 진실을 일깨워 준다. 이 가르침은 정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적의를 물리치는 방법을 일깨워주고 있다.
물론 이 가르침은 개인 관계에서 타당한 윤리적 원칙일 수 있으며, 따라서 집단이나 국가간에도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 의문시될 수 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그 문제를 통찰했다. 개인간의 관계에서는 도덕적 선의가 통할 수 있지만, 집단이나 국가간에는 그런 선의가 통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래서 집단간에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 통찰은 중요하지만, 니버는 결국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미국의 힘의 우위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정당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물론 개인간의 윤리적 원칙과 방법이 집단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방법이 일치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윤리적 원칙은 다르지 않다.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적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개인 관계나 집단 관계가 다를 수 없다. 제재와 응징, 인도적 지원과 대화, 이 두 방법 가운데 어떤 것이 과연 평화를 가져올까? 라인홀드 니버는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자신의 입장을 펼쳐 결국 현실주의에 빠지고 말았지만, 오늘의 상황을 봤다면 다른 결론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봄직하다.
문제는 무엇이 진정으로 평화를 이루는 길이냐 하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은 현실에 순응하고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수 앞을 내다보고 근본적 방법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5. 평화를 위한 한ㆍ일 양국 시민사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앞에서 말한 한ㆍ일간 비대칭적 관계는 지정학적으로 부여된 운명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냉전체제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 또는 그것을 대신한 세력권의 대립 조건하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일 뿐이다. 그 대립 가운데서 미국의 전략이 지속되는 조건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그 대립이 완화되거나 미국의 전략이 바뀐다면 한ㆍ일간의 비대칭적인 관계 또한 개선될 여지가 훨씬 커진다. 설령 현재 동북아시아의 대립구도가 유지된다 하더라도 각각의 사회 변화가 그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각각의 사회 변화가 그 대립 구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 동력이 될 수 있다. 한국의 김대중 정부 시절 미국의 강경 노선을 조절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ㆍ일간의 관계 또한 상호간 긍정적 영향을 끼쳤던 경험을 환기해볼 수 있다. 정반대로 전후 일본이 미국의 점령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일본 사회의 내적 조건이 중요한 구실이 되었던 점도 환기해볼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책임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책임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제를 포함할 뿐 아니라 정의로운 경제체제를 형성하고, 사회문화적으로 불의한 체제를 정당화하는 배외주의,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극복하는 과제를 포함한다. 그것은 각기 사회 안에서 정의로운 평화를 이루는 것이며, 나아가 국제적 차원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시민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와 세계를 위하여 모든 분야에서 연대와 협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정의와 평화의 정신에 근거하여 오늘날 여러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배외주의,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타파하는 데 더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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