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람을 감화시키는 말 - 이사야 6:1~13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7-06-12 09:37
조회
6185
2017년 6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람을 감화시키는 말
본문: 이사야 6:1~13

예언자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체험을 전하고 있는 본문말씀은,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입니다. 본문말씀의 표현 자체가 고대의 종교적 상징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거니와 그 논리적 문맥도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문말씀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본문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먼저 실마리부터 말씀드리면, 예언자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아주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월적 존재로서 하나님, 현대 신학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단순한 신학적 사변의 결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앞에 선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에서 그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자기 세계를 뛰어 넘음으로 모두에게 유익한 의를 이루고, 결국 하나님의 의에 다가서는 길이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데 이사야의 선포의 핵심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온갖 고대적 표상들이 등장하는 본문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가 참 어렵지만, 한 대목 한 대목 그 말씀의 의미를 음미하고자 합니다.
대개 대예언자들은 본격적인 예언활동을 하기에 앞서  소명을 체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사야는 먼저 일정한 예언활동을 펼치고 난 다음 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소명의 체험을 전하고 있는데,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습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본문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것으로 전하지 않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고, 천상의 존재들 곧 스랍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하나님은 이사야 앞에 나타나십니다. 스랍들마저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뵐 수 없다는 관념의 표현입니다. 스랍들은 노래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그 찬양과 함께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현현을 묘사하는 고대의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이 때 예언자 이사야는 먼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신을 뵐 때 먼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은 고대의 종교적 관념에서 일반적이지만, 이사야의 이 두려움은 예언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체험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옛 조상들의 시대 야훼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민족의 편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종교적 의례를 치르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확증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서 하나님은, 그 전통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낯선 방식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함께 하는 분이 아니고, 언제나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별안간 내 삶에 개입하여 내 삶을 교란시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비움을 요구합니다. 자기들만의 정당성을 철회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은 ‘만군의 주’ 하나님, 곧 자신들만의 하나님이 아닌 보편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유린당하고 고통을 겪는 현실을 통해 그 깨달음에 이릅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은 내가 옳든 그르든 무조건 내편이 되어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의를 이루는 이들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두려움은 그 의를 이루지 못한 스스로의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는 의롭지 못한 백성들 가운데 살고 있으며, 스스로 또한 의롭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이사야에게 극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한 그에게 한 스랍이 타고 있는 숯을 들어 입술을 정화합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백성들과 함께 똑같이 그 한계 안에 갇혀 있던 이사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며, 내 욕망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하나님을 절실하게 체험하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체험하고서야 이사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그런데 자기 한계를 절감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이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말씀이 기가 막힙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칠십인역에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도 알지는 못한다’)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칠십인역에는 ‘이 백성의 마음은 둔해졌다. 그들은 귀가 막혀 듣지 못하고, 눈은 아예 감아 버렸다.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그리고 예언자의 선포를 통해 일깨워도 깨우치지 못하는 백성의 현실을 말합니다. 스스로 파국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고집스럽게도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반문합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곳에 남는다 해도, 그들도 다 불에 타 죽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 역사적 현실을 말합니다. 당시 신흥 강대국 앗시리아는 주변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초토화시켰습니다. 예언자 이사야 당시 아직 유다에는 그 손길이 닿지 않았지만, 그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 파국의 경험을 겪고 나서야 사람들은 정말 옳은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파국을 경험하고 나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현실을 보면, 이 말씀은 오히려 낙관적일 정도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비관적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본문말씀은 한 가닥 희망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그 희망의 선포가 매우 미미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훗날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는 백성이 돌이킬 것을 요구하며 심판 선언의 강도를 높일수록 평화의 나라에 대한 희망의 선언 강도 또한 높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과 희망의 선언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자기 힘을 자랑하고 그 힘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그 심판이 이뤄질 때 평화의 세계가 이뤄질 것을 선포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가장 깊은 영향을 남길 만큼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는 끊임없는 희망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말씀에 집중할 것 같으면,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우선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두려워했던 체험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의 붕괴를 뜻합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소명체험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데 있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정당성에만 사로잡힌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의를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무엇이 과연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인가 늘 마음에 새기며 그 의를 이루는 길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말씀의 요체를 생각하면,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체험,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 그것이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요체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 그 말씀의 요체를 확인함과 더불어 그 말씀의 의미를 체현해야 할 한 개인적 인격이자 동시에 공인으로서 예언자의 역할과 그의 말의 선포방식에 대해 상상을 해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예언자의 소명체험이 주인공 예언자의 입술과 직결되어 있기에 저의 평소 생각에 상상의 자극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기에, 언제나 투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설적으로 그 혀로, 입술로 선포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는 언제나 역사적 상황이 전제되어 있고, 그 역사적 상황에서 선포하는 예언자 자신의 인격과 경험이 매개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의 선포는 단지 입술로만 선포된 것이 아니라 예언자 스스로의 삶으로 선포되기도 했고(그 전형적인 경우가 호세아), 때로 긴급한 상황에서는 예언자의 기인행각으로 선포되기도 하였습니다(그 전형적인 경우가 예레미야). 아마도 예언자 이사야는 학식이 풍부하고 그 제자들 또한 많았기에 풍부한 언어로 예언활동을 선포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사야 또한 모든 예언자들에게 공통된 예언 선포의 다층적 차원을 지녔을 것입니다.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본문말씀에 대한 주석적 해설은 아니고, 본문말씀이 자극하는 저의 생각이지만, 저는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저의 통찰입니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머리에서 입술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말,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입술로 나오는 말,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아 온 몸으로 표현되는 말,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고도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 수 없는 말(아마도 배설될 수밖에 없는 말),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머리에서 입술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말은 자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고 사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에 가장 선명한 언어가 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꼭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많은 경우 상처를 입히는 말은 이런 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머리에서 가슴을 통해 입술로 표현되는 말은 성찰을 동반한 말로써 성찰을 동반한 만큼 상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때로 모호할 수도 있고 어눌할 수도 있지만, 상대에게는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말입니다.
셋째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통해 온 몸으로 표현되는 말은 세 치 혀끝과 짧은 입술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진정한 말일 것입니다. 행동으로서의 말, 삶으로서의 말입니다. 이 말은 때대로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하는 사람의 언행일치를 보여주는 진정한 말입니다.
넷째 머리에서 오장육부를 돌고도 어떻게 표현되는지 모르는 말은 일종의 신비의 차원입니다. 나도 모르고 사실은 내 앞의 상대에게 표현되지는 못했지만 어딘가에 뿌려지는 말입니다. 이 자연이 알고, 하나님이 안다고 하면 될까요?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은 끝끝내 알지 못할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영향을 끼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 영향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표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는 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말이며, 내 삶의 흔적입니다.

오늘 저의 이런 상상이 오늘 본문말씀과 무관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역할이 하나님의 진정한 공의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오늘 말씀은 예언자의 입술을 불로 지지는, 그 강렬한 표상을 통해 예언자의 소명체험을 묘사하고 있을까요? 자기 생각대로 나오는 대로 내뱉는다고 해서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강렬한 표상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적인 자리에서 진실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비단 그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서로 소통하며 그 진실에 근거한 희망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 뜻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 더불어 이 세상 한 가운데서 그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한다면, 더더욱 깊이 그 진실을 새길 수 있기를, 그래서 이 땅 위에서 서로 말문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여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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