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와 그 제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 - 요한복음 1:35~42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7-16 18:10
조회
8374
2017년 7월 16일(월)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와 그 제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
본문: 요한복음 1:35~42

여러분의 배려로 휴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전반부에는 만나야 할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가운데 수요일과 주일 이틀간은 두 교회에 들러 말씀을 나누고 생각을 나눴습니다. 후반부에는 주로 골방에서 책을 읽고 논문을 구상하는 중에 잠깐 잠깐 짬을 내어 여유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두 팀의 교토 손님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게 되어 있는데(8.14~16 / 8.25~27),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 드리고 또한 여러분의 협력을 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이 아니라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이라 했는데, 요한복음이 전하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의 증언과 요한복음의 증언은 많은 점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는데,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 관한 증언 역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그 차이는 성서의 본문 자체가 하나의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대해 각자의 처지에서 해석을 시도하는 성격을 지닌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방금 요한복음을 함께 읽는 가운데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 관한 증언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감을 잡았습니까? 금방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면 성서본문에 대한 기억과 이해가 매우 깊은 경우이겠지요. 아마도 한 순간에 그 차이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공관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성서일과의 또 하나의 본문으로 제시된 누가복음 5:1~11을 따라 그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를 따라 살펴보면, 그 이야기는 명백히 예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가운데, 호숫가에서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는 어부들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배 가운데서 시몬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의 배에 올라 배를 뭍에서 약간 떼어놓으라고 하신 다음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에게 일러 “깊은 데로 나가거라.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밤새 애를 썼는데도 잡지 못하였지만, 선생께서 말씀하시니 그렇게 해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의 말씀에 신뢰를 두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저 한 번 더 시도해보겠지만 어부인 자신이 판단하기에 별 소득은 없을 것이라는 회의가 베드로의 반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 대로 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동료들을 불러 다 걷어 올려 두 배를 채웠는데,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태를 경험하고 베드로는 깜짝 놀라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야기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의미하는 바가 도대체 뭘까요? 베드로의 이와 같은 반응은,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두려움입니다. 쉽게 말하면 경이감이지만, 그 경이감을 넘어선 경외감입니다. 사실 믿음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의 상식과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그 깊이를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태도입니다. 이 고백은 말 그대로 떠나달라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사태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베드로의 태도를 말합니다. 어부로서 자신들의 상식을 뛰어 넘어선 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이제 뭘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 때 예수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상식의 표피를 넘어 깊은 차원에 이름으로써 진정으로 사람을 구원에 길에 이르게 하는 제자직으로 부르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그 부름 앞에 제자들이 따라 나선 것도 극적입니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대고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간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모든 소유와 조건을 버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 자체로 우리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른 사건이 매우 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늘 기억됩니다만, 그 불제자 분은 베드로를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는 그런 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이 이야기는 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의 증언은 어떨까요? 그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가 처음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상황도 서로 부합되는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성서본문을 대할 때는 이런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헤아릴 수 있어야 하고, 그 차이를 헤아릴 수 있을 때 성서 본문말씀에 대한 이해가 풍요로워지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 문자적 서술의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문자에 매이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깊이의 차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서해석의 철칙이 되어야 합니다.
우선 요한복음이 전하는 그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 서두에는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 둘과 함께 있는데, 예수께서 지나가십니다. 그걸 보고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구약성서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매우 빈번히 등장하는 익숙한 표상이지만, 그 의미가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통상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순결한 존재로서 세상 죄를 짊어지는 존재로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고 기대하는 종교적 표상에 따라 예수님을 해명하는 방식입니다.
두 제자는 그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이들을 보고 예수께서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께서 계신 곳을 따라가 그 날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시간은 10시경(오늘날 시간 개념으로 4시경)이었습니다. 그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요한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이제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지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 말고는 홀연히 사라집니다.
어쨌든 그렇게 예수의 제자가 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했습니다. ‘메시아’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안드레아는 그 존재를 확인한 다음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옵니다. 시몬 역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시몬을 만난 예수께서는 곧바로 그를 알고 있다는 듯이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합니다. 아람어로 게바는 곧 그리스어로 베드로를 뜻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그 이름을 얻는 것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인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불립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전하는 처음 제자들에 관한 증언입니다. 어떻습니까? 누가복음이 전하는 이야기에 비해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삶의 파문과 단절을 극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어부로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어쩌면 느닷없이 나타난 예수께서 그들에게 놀라운 일을 보여 주고 제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자로 나서기 위해 자신들의 소유까지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극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몇 가지 점이 두드러지게 차이 납니다.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른 것은 예수가 아니라 증인들이었습니다. 먼저는 세례 요한, 그 다음은 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증인들이 예수의 존재를 알아보고 인정하고 믿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로 이 증인들은 이미 구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만난 순간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구도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 그 안드레아에 의해 부름을 받은 시몬, 곧 베드로는 이미 진정한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 증인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그분의 길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들이 버려야 했던 것은 일상의 소유가 아니라 이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함축하는 바입니다. 물론 이 점은 잘 새겨야 합니다. 그릇된 방향에서 바른 방향으로 전향한 것과는 다릅니다. 세례 요한 또한 예수의 증인이었다는 점에서 그 사상적 전환은 일종의 질적 전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희미하게 알고 있던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마침내 체화하는 전환이라고 할까요? 세례 요한을 떠나서 예수를 평생 따르는 삶으로의 결단은 그런 전환을 뜻합니다.
예수의 부름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증인들의 승인과 믿음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각성과 성숙을 뜻합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 이후에도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에서는 단박에 모든 진실을 깨우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각성으로 모든 진실을 환하게 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갖는 특별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 각성의 성숙, 곧 희미한 기대가 확실한 기대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 전환으로 인한 새로운 삶의 지속 가능성을 뜻합니다.

객관적 사실의 차원에서 보자면 동일한 사건을 전하는 복음서의 증언들이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을까요? 그 차이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을까요?
아마도 복음서들간의 그 증언의 차이는 기록 연대와 정황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곧 그 삶과 말씀 자체가 충격적이고 신선한 깨달음과 믿음을 불러일으켰던 국면이 있었다면, 또 다른 한편으로 깊은 깨달음과 믿음이 요구되었던 국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들이 그 처음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요한복음서는 그 나중 국면을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피상적 따름에 그쳐서는 안 되고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체화되는 깨달음과 믿음에 대한 기대에서 그와 같이 증언하였을 것입니다. 온전한 세계관의 변화를 동반하는 믿음의 차원에 대한 기대입니다.

예컨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띠게 합니다. 지난 주간까지 휴가중 제가 많은 일본인들을 만나 이야기했지만, 일본사회에서는 그 느낌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 원칙적 보편적 의미에 공감하겠지만, 한국인들이 느끼는 만큼 그렇게 흥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어진 것이라 그럴지 모릅니다. 반면에 그야말로 분투하고 쟁취해야 했던 우리의 상황에서 그 체감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른바 민주주의적 조치라고 여길 만한 하나하나의 일이 성취될 때마다 환호하고 반깁니다. 그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가시적 조치가 민주주의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 구성원이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 민주주의의 주체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 민주주의는 언제든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된 말로 ‘진보 꼰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의제에 공감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전혀 비민주적인 인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민주주의란 그저 개인적 주장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합의를 이루는 하나의 삶의 방식인데, 그 삶의 방식은 저마다의 세계관과 의식의 변환을 동반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확실한 희망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 사상의 질적인 전환은 바로 그 차원을 함축한다 할 것입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계기를 통해서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고, 제자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각기 다른 복음서가 전하는 증언의 그 두 가지 감격의 차원이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 그 자체가 우리의 삶에 파문을 일으킬 만큼 경이롭게 다가옵니까? 나아가 그 삶과 말씀의 진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습니까?
지금 그에 대한 답변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감히 그 답변을 강요할 입장에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겸허히 그 물음 앞에서 우리를 돌아보자는 뜻에서 던지는 물음입니다. 적어도 우리에게 신앙은 우리를 그저 그럴 듯하게 꾸며주는 어떤 악세사리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던지는 물음입니다. 하긴 오늘 같은 세상에서 악세사리로서 전혀 도움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속하고 있는 이유, 그 까닭을 마음 깊이 새겨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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