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잃은 양의 비유를 생각하며 - 마태복음 18:10~14[千葉宣義 목사]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7-10-19 13:29
조회
7539
2017년 10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잃은 양의 비유를 생각하며
본문: 마태복음 18:10~14(// 누가복음 15:3~7)
치바 노부요시(千葉宣義) 목사(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야와타포도나무교회)
통역: 이상경 목사(일본기독교단 교토교구 후쿠치야마교회)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교토 남쪽에 있는 야와타시, 인구 약7만명되는 시에 있는 야와타포도나무교회에서 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전노회와의 교회교류가 20년 가까이 됩니다, 그 동안 친밀한 교류할 수 있었던 최형묵목사님과, 천안살림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진심으로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도 통역으로 수고하는 이상경 목사도 이 교회교류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경목사는 일본 사회에서 오래동안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저희 교토교구 후쿠치야마교회 목사로 2014년4월에 부임하였고, 또한 교토교구 서기라고 하는 중책을 맡고 있습니다. 최형묵목사님이 교토에 오실 때는, 가능한 함께 시간을 가지고 이상경 목사와 같이 먹고, 마시면서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가집니다만, 이 시간이 늘 즐겁고, 기대가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최형묵목사님은 일본 교토를 섭렵하고 있으며, 교토 사는 우리들이 모르는 곳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 자타가 공인하는「교토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1)  오늘 본문 말씀은 잘 알려진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이 본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야와타의 교회에서는 얼마 전부터 복음서에 있는 「비유」를 텍스트로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10회 이상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4:33에는, 예수가 군중들의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비유로 알기 쉬운 이야기를 하였다고 생각해 볼수 있을 것입니다. 「알아 들을 수 있는 정도로」라는 것은「비유」는 알기 쉬운 이야기를 사용하여 전하였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쓴 마가의 비유는, 마태·마가·누가 3복음서, 일반적으로 「공관복음」이라 불리고 있습니다만, 이 가운데 마가가 가장 비유가 적습니다. J.에레미아스라는 독일 성서학자가 1962년에 「예수의 비유」라고 하는 연구서를 저술하였습니다. 50년도 넘은 저서입니다만, 비유에 관한 고전적 저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는「공관복음서의 비유 일람표」가 있고, 39개 비유를 다르고 있습니다. 비유로 규정하는 방법도 여러가지이지만, 이 중에는 「비유」라고 말하여지는 것과「속담」과 같은 짧은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2) 이 「잃은 양의 비유」는, 누가복음에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3∼7절입니다.
현재 일본교회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성서번역은 1988년에 가톨릭교회와 공동으로 번역한 「신공동역」입니다. 이 번역 성서에는 문서 단락 처음에 그 문절에 씌어진 내용에 관한 표제를 달아 놓고 있습니다. 이 표제는 읽는 사람에게 편리할 경우도 있고, 반면 씌어진 내용을 미리 규정해버리므로 방해될 경우가 있어 찬반양론입니다. 그 표제에 의하면, 이 비유를 마태복음에서는 「길을 잃은 양의 비유(迷い出た羊のたとえ)」라고 표제를 달고 있습니다. 확실히 본문에서도 「그 가운데 한마리가 길을 잃었다」 (마태18:1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잃은 양의 비유(見失った羊のたとえ)」라고 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소개하자면, 일본교회에서 「어린이 찬미가」라고 하는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72장에 「어린 양이」라고 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은 「찬미가21」이라고 하는 교회에서 널리 사용하는 찬송가 200번에 수록하여 있습니다). 그 가사에는 「어린 양이 집에서 떨어져 어느 날 멀리 놀러가, 꽃 피는 들판에서 즐겁게 놀다가 돌아가는 길마저 잊어버렸습니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가사들 보며, 어린 양은 놀이에 열중하다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라고 하는 점에서, 마태의 「길을 잃은 양」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금 신약 성서는 27문서입니다만, 그 중에 들어가지 않은 고대 문서 「외경」으로 불리는 문서가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도마복음」이 있습니다. 이 문서는 예수의 어록집으로서 편집된 것으로, 예수의 명언집같은 것입니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나눈 이야기인가하는 상황설정이 없는 어록집입니다. 1945년에 그것은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라고 하는 곳에서 발견된 53문서 가운데 하나로, 코프토어로 씌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관련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목자와 같습니다. 무리 중 제일 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놓아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갔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다음 그는 그 양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너를 귀히 여긴다」 (도마복음107)

도마는 이 이야기를 백 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 이야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마리를 잃어버렸다. 이것은 마태와 비슷하지만, 그것이 「제일 큰 양」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양을 찾은 것은 이 목자가 제일 큰 양을 나머지에 아흔아홉 마리보다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일 큰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어록집에는 문맥(누가 어디에서, 누구를 향해서 이야기하는가)이 없으므로,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3) 이 비유가 말하는 문맥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마태의 경우. 예수의 제자들이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 다음이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하늘 나라,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란, 신앙이 불확실해서 교회로부터 길을 잃은 사람에 대하여, 이 비유가 말하고 있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읽게 됩니다.
누가의 경우는15장 「잃은 자의 회복」을 테마로 이 양의 비유와 함께,「되찾은 드라크마」비유, 그리고「되찿은 아들(탕자) 」의 비유, 세가지 비유를 연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잃은 것의 회복을 친구와 이웃이 함께 기뻐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잃은 양을 찾아서 기뻐했을 때,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 보다, 오히러 그 한마리 양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는 이 결론을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잃은 양」이란 회개를 필요로 하고 있는 자, 즉 「죄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흔아홉은 회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의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죄인」은 누구일까요? 죄에 대한 자각이 있는 사람인 것인가? 예수가 다른 장소에서 이 죄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유명한 구절 마가복음2:13∼17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입니다. 세리와 죄인, 많은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당시의 유대교 지배자인 바리새파의 율법학자가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는 식사를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는「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왔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의인」이란, 예수를 비난하는 율법학자이고 그들은 언제나 율법을 지킴으로 의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리나 창녀라고 불리는 사람, 또 중한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등, 이 사회 안에서 곤란(困難)한 곳에 있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고, 사회관계로부터 배제하였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죄인」이라고 하는 낙인은 지배자가 멋대로 부당하게 찍은 것이고, 그들이야말로 무조건으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예수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인 사람을 회개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앞서 말한 레위와의 식사 이야기(누가5:27∼32)에서도, 마지막에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발언을,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라고 고쳐 쓰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언동에 깊은 죄(부채)을 느끼고, 그것을 회개하고 새롭게 살려고 생각하는 것은 있어도 좋은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우리들은 그것의 되풀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죄인을 초대하는 잃은 양의 회복이라고 것은, 당시 종교적 지배가 강한 유대 세계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인」이라고 규정된 사람들, 그러한 낙인 찍혀 배제되고, 가혹한 현실에 몰리는 사람들이 무조건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갈릴리라고 하는 변방의 땅에서 많은 민중에게, 놀랄 정도로 환영받은 것은, 부당하게 고투(苦鬪)를 떠맡게 된 사람들의 해방을 강조한 그 삶의 자세가 아니었겠습니까?
초대 교회의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그 후 교회에서도 계승되어 교회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아는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죄 많은 이 세상」에 하느님 구원을 알린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현실의 지배·억압·차별에 의해 부당하게 약한 자리로 몰린 사람, 우리들이 사는 사회의 정의 없음과 불공평한 사회의 현실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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