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 자유인의 길 - 예레미야 31:31~34[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5-13 17:31
조회
14878
2018년 5월 1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 자유인의 길
본문: 예레미야 31:31~34



‘신약’, 곧 ‘새로운 약속’이라는 말이 어디에 등장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일까요? <구약성서>일까요?^^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에 등장합니다. 본문말씀은 ‘새로운 약속’, ‘신약’의 유래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서 전반을 통해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로,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심오하고, 또 특별히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까닭이 뭘까요? 그 까닭을 알기 위해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생각하기에 따라 여러 답이 주어질 수 있겠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면서 주체로서 스스로를 의식한다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더불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인간의 도드라진 특징은 자기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인간을 운명적 질서의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해나가는 주체로 세워주는 요체일 것입니다. 성서 창조 이야기 가운데서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정신사에서 볼 때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적 성찰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시기가 있습니다. 정신사의 차축(車軸)이 형성된 시기로, 성서의 정신세계를 비롯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고전적인 정신세계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겪은 혼란과 고통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혼란과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극복하고 빛을 드러내게 할 것인가 하는 성찰로 이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의 본문말씀은 바로 그 각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멸망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고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죄값을 치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그 나라를 회복시켜주겠다는 말씀에 이어 옛 계약과는 다른 새로운 계약을 맺으리라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새 계약이 모세의 계약과 다르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고 합니다. 이어,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를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약속이 과연 어떤 점에서 모세와 맺은 계약과 차이가 날까요? 오늘 본문말씀은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를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모세의 시내산 계약은 돌판에 새겨졌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 계약의 내용은 다른 자세한 설명과 함께 문자화되어 있기에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 해석에 따라 악용되기도 합니다. ‘율법주의’는 그 율법의 정신이 악용된 결과입니다. 지키지 않아 파기되고, 악용됨으로써 사실상 파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돌판에 새겨진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약은 ‘가슴속’에 ‘마음’에 새길 것이라 했습니다. 형체가 없습니다. 그것을 전해 주는 돌판이나 문서와 같은 매체가 없습니다. 곧바로 마음에 새겨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필요가 없어지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깨닫는 사람이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감을 따라 억지로 지키는 약속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지키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경지입니다.
<공동번역>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뜻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개별 사람들의 마음만이 그렇게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그렇게 바뀐다는 뜻입니다. 너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우리 모두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을 겪거나 고통을 겪는 일이 없는 세계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에게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단지 ‘신약’이라는 말이 기원한 본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약’의 핵심을 미리 보여준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체제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구하러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진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시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사람을 옭아매는 체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희생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향하여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
안식일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식일이 제정된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이 제정된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데, 생명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금기사항(39×6=234)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깨달음이 중요하고, 그 깨달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또한 끊임없이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갈라 5:1)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에 매여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닙니다. 법이 있든 없든 마땅히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우리말에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타율적인 규율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요체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는 이른바 법치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에 비추어 보면, 성서의 가르침, 예언자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사도의 가르침은 오늘과 같이 복잡한 사회가 아니라 목가적인 시대의 윤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법의 정신입니다. 법의 정신, 특별히 법치주의의 정신이 뭘까요? 그것은 권력의 분립과 견제를 기본정신으로 합니다. 권력의 분산과 견제가 필요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마땅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권력은 분산되어야 하고 견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법치주의의 정신입니다. 저마다의 삶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삶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도록 질서를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법치주의 정신입니다.
그 정신이 사라질 때 어떻게 됩니까? 이미 앞에서 율법의 오남용을 말했지만, 법의 오남용이 횡행하게 됩니다. 법을 악용해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아니면 법망을 피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온갖 시도가 벌어집니다. 그러한 현실을 생각하면, 역시 법의 정신, 법의 윤리적 기초를 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고 저마다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그 기초입니다. 그 사실을 모두가 자각할 때 법은 법으로서 순기능을 다하고 그 가운데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웁니다.
오늘은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입니다. 1980년 광주는 그 모든 기본(법과 민주주의, 인륜마저도)을 무너져 내린 비극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렇게 무너져 내릴 수 없는 사람들의 저항이 빛났고, 오늘 한국 민주주의는 그로부터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유인들의 외침과 항쟁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오늘은 또한 어버이주일이기도 합니다. 성서 십계명은 그 앞부분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것을 말하고, 안식일을 지킬 것을 말한 것에 이어, 인간관계 안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제시하는 첫 머리에서 부모 공경을 말합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애 20:12) 신약성서는 이를 이렇게 환기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에베 6:1)
무슨 의미일까요? 십계명을 강제적인 의무를 규정하는 법조항 정도로 간주하면 그 정신을 간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도리를 일깨워주고 인륜의 기초를 밝혀주는 데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그 인륜의 기초를 밝혀주는 첫 머리에 부모 공경이 나오고, 그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면 오래 살 것이라는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지속되는 생명의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에 벗어나지 않는 도리를 다할 때 인간 삶이 보장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의 연속성을 깨닫고 그렇게 깨달은 만큼 사랑의 유대를 지켜나갈 때 인간의 삶이 보장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명문화된 법조문이 있어서 비로소 의미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터득할 수 있는 이치입니다. 자신에 관한 물음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하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차적 기원이 부모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이기적인 가족주의 윤리를 강조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마땅히 깨달아 알 수 있는 그 진실을 재삼 환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륜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자명한 이치가 되고, 누가 하라 마라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이치를 따를 때 인간의 삶은 생명으로 충일한 관계로 지속된다는 것을 환기해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저마다의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그런 만큼 타인의 사람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랑의 유대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으로부터 배어나오는, 그런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삶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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