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당당히 걷는 삶을 보장하는 신앙 - 사도행전 3:1~10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8-19 13:53
조회
10212
2018년 8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당당히 걷는 삶을 보장하는 신앙
본문: 사도행전 3:1~1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렇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 늘 난감해집니다.^^

어떤 교리적 명제가 명쾌하게 말하는 바와 같이 그대로 믿는 것을 뜻한다면 난감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난감해한다면 믿음에 관해 끊임없이 물음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물음은 아마도 믿음이 단지 어떤 교리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수련회를 1박2일간 이 교회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신도회 대표 모임을 통해 교우 여러분들이 전적으로 기획하고 준비하여 진행한 수련회가 아주 유익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함께 이야기한 것도 좋았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된 것도 좋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늘 던진 물음에 대한 답들이 저마다의 입장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떤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인지 하는 점에 대해서도 공통의 방향이 드러나고 의견이 수렴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의 본문말씀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따라서 교회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치료한 이야기입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모이는 시간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구걸을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기도회 시간을 지켰다는 것은, 아직 유대교와 별개의 종파로 구별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성전에 들어가던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그를 눈여겨보며 말합니다. “우리를 보시오.” 걷지 못하는 사람은 뭔가 얻게 되리라는 기대로 빤히 쳐다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이렇게 외치며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놀랍니다.

성서에서 육체적 질병의 치유 이야기는 언제나 육체적 질병의 치유를 넘어선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치유의 기적은 언제나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깊이 헤아리자면, 이 이야기는 이미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원치 않게 자신을 늘 주저앉은 신세로 머물러 있게 만드는 운명적인 조건을 말함과 동시에 오랜 고통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그렇게 있는 한 그는 항상 남의 도움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묘사된 바와 같이 움직일 때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앉은 자리에서도 남의 적선에 의존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나타났을 때, 이 걷지 못하는 사람이 기대한 것은 은과 금이었습니다. 그 도움으로 그는 충분히 감지덕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비록 걷지 못하는 사람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생존하는 데 필요한 음식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가 홀로 설 수 있도록 그를 돕습니다. 걷지 못하는 거지에게 은과 금, 곧 돈을 주는 것과, 그가 걷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어나 제 발로 걸을 수 있도록 해준 것 가운데, 어떤 것이 그 걷지 못하는 거지에게 절실한 것이었을까요? 물어보나마나한 우문입니다. 그가 남에게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만든 걷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절실한 것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은과 금을 더 절실히 기대한 것일 뿐입니다.

성전 앞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보면 참 기묘한 대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성전종교, 곧 유대종교의 전통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현실 가운데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성전종교의 시혜를 받으며 목숨을 연명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사람들이 성전을 드낙거리는 시간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성전종교를 믿는 신실한 사람들의 선량한 마음으로부터 늘 시혜를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의 동정과 자선이 그를 버티게 해 주는 조건이었습니다. 동정과 자선은 모든 종교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각박하지 않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거지는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 성전종교가 베푸는 시혜와 전혀 다른 것을 베풉니다. 아예 그를 벌떡 일으켜 세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도록 놀라운 능력을 베풉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저앉아 운명을 탓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똑바로 서서 걷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나를 종으로 옭아매는 모든 조건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또 하나 의미심장한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는 것은,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이 온전히 치유를 받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곧바로 성전에 들어갑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멀쩡하게 된 이 사람은 당당하게 성전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격을 갖추었으니 문제가 없었을까요? 순전히 형식적인 논리로 따지면 그렇게 받아들여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벗어난 신적 능력이 가시화된 사건 앞에 빠진 충격입니다. 일상적 질서와 경험, 그에 기반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게다가 성전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일종의 침입과도 같은 것입니다. 평온한 일상을 무너뜨리는 침입입니다. 이 사건은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난 사건이 그저 그 당사자에게 구원이 되는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를 예고하는 중대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전하는 이야기 바로 다음에 나온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앞 2:43~47의 말씀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을 간결하고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코뮨)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늘 사도들의 가르침을 되새겼고,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삼아 필요에 따라 함께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사랑의 식사를 나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고 날마다 이를 통해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갔다고, 바로 앞의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모든 사람을 주체로 일으켜 세워 당당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실제적인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소유와 자격(재산과 인격)에 얽매인 당대 로마세계 안에서 전혀 다른 삶을 추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걷지 못하는 거지를 일으켜 세운 사도들의 능력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전혀 다른 삶의 질서를 짜고 그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을 다한 사도들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성전종교가 가르친 동정과 시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수년 전에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배운, 캐나다연합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선교 개념을 이 대목에서 다시 환기하고 싶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선교 개념의 변화를 “자선에서 정의로”라는 말로 압축하며, 자선(charity), 봉사(service), 옹호(advocacy), 정의(justice)로 변화되어가는 선교의 의미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푸드뱅크의 예를 들어 자선은 즉각적인 필요에 응하는 것으로, 봉사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푸드뱅크에서 일하는 것으로, 옹호는 공동체의 부엌과 신용협동조합 등을 만듦과 아울러 정부에 로비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의는 공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존감을 갖고 정정당당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선교의 본령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화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없고 자격이 없으면 걷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소유’만을 말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무소유’여도 ‘무자격’이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치유책일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한겨레>, 2018.8.16)에는 흥미로운 의식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우리 사회 청년들의 의식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평화 의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청년들의 의식과 관련해서는, 기성세대들이 주로 남북관계에 대한 의식을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경향이 강한 반면 젊은 세대들은 분배와 성장 등 복지관련 사항에 대한 태도로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며, 그 점에서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보수화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평화 의식과 관련해서는, 평화라는 말에 연상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한국인은 비둘기를 떠올린 경우가 가장 앞선 반면 구미 사람들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포함한 공공권리에 대한 것이 가장 앞섰다고 합니다. 평화를 추상적인 상징으로 떠올리는 것은 그것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반면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가치들과 결부시키는 것은 그렇게 실현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의 삶의 조건 가운데서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궁극적 차원을 함축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삶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동력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점점 더 많은 소유와 점점 더 많은 자격을 갖추어야만 살아가도록 내모는 우리 사회에서,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마저, 아니 교회가 더더욱 사람들에게 걷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삶을 살도록 강요합니다. 은과 금에 의존하는 삶, 보상에 의존하는 삶, 먹여주는 밥, 선포되는 말씀만 받아먹는 삶을 강요합니다. 여기서 보상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신앙인이 형성됩니다. 그 보상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자기 존재를 파괴하는 것으로 두려워하는 신앙인이 형성됩니다. 걷지 못하는 신앙인입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으로 은과 금에 의존하는 것보다 은과 금이 없어도 제 발로 걷고 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모습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우리는 그 음성을 가장 기쁜 소식, 곧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바로 그 구원의 복음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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