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말의 무게, 삶의 무게 - 예레미야 20:7~13[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3-24 13:27
조회
41892
2019년 3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말의 무게, 삶의 무게
본문: 예레미야 20:7~13



성서의 예언자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인상적인 예언자를 꼽는다면 과연 누구일까요? 저는 서슴없이 예레미야를 꼽겠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몸소 극적인 고난의 삶을 살았고 그 메시지 또한 한 없이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입으로 외친 선포 이전에 고난의 삶 자체가 이미 무거운 메시지라고 할 만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예언자였습니다. 혼탁한 세상, 역사의 격랑기, 특별히 유다왕국이 멸망에 이르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예언자로서, 그 예언을 선포하는 한 인간의 내면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는 예언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인상적인 면모를 꾸밈없이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한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함께 읽는 동안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그 첫머리를 볼 것 같으면 신성모독이라 할 만큼 충격적인 고백입니다. 본문말씀의 전후 말씀은 제가 신학에 처음 입문해서 구약성서를 배울 때 가장 충격적으로 느껴졌던 성서 말씀의 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재음미해볼까요?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7절)
첫 문장은 정확하게 원문 뉘앙스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야훼 하나님, 당신은 나를 꾀였고 나는 꾐에 넘어갔습니다.”
‘속였다’는 표현은 ‘꾀였다’는 원문의 부정적 의미를 알기 쉽게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대체로 모든 우리말 성서가 하나님의 호칭 다음에 이어지는 주어를 ‘주님’으로 옮기고 있지만, 원문은 대등한 관계에서 스스럼없이 부르는 ‘당신’으로 새기는 것이 적절한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 많은 문서들, 노래들에서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고, 우리들도 종종 그렇게 부르기는 합니다만, 우리말로 된 모든 성서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말 어법상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줄여 말하면, 통상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더욱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을 향해 고백하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백을 지금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한테 속아서 나는 망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통상적인 신앙의 관념으로 보자면, 신성모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어째서 그렇게 심한 말을 지금 하나님께 내뱉고 있을까요? 더욱이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소명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입에 말씀을 맡겨주셔서 그 말씀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1:9). 모든 예언자가 하나님을 대변해서 선포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아예 하나님께서 말씀을 예언자의 입에 넣어 준다는 표현은 이례적입니다. 그 만큼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태도,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를 극적으로 나타내주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맡은 예언자가 어째서 하나님께 속았다고 항변하고 있을까요? 그 까닭이 다음 구절에 이어집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8절)
예레미야가 반복해서 파멸의 위협을 선포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자행되는 범죄행위를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범죄행위를 고발하였고, 왜 파멸의 위협을 반복해서 선포했을까요? 예레미야서 6장은 예레미야가 어떤 말을 선포하였는지 더욱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아야 할 도성이다. 그 도성 안에서는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 샘이 물을 솟구쳐 내듯이 그 도성은 죄악을 솟구쳐 내고 있다. 그 도성에서 들리는 것은 폭행과 파괴의 소리뿐이다. 나의 눈 앞에 언제나 보이는 것은,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뿐이다. 예루살렘아, 이 고난을 경고로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나의 마음이 너에게서 떠나갈 것이다.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를 황무지로 만들고,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이 되게 하겠다.”(6:6~8)
권력자들의 폭력으로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즐비한 사회의 실상에 대한 고발이요, 경고입니다. 사람들, 특별히 연약한 이들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질서와 통념, 그러기에 그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그 질서가 폭력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그 마땅한 말씀이 어째서 조롱거리가 될까요? 그 폭력의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들이나 그 범죄행위에 어떤 형태로든 기대어 살며 가담하고 있는 자들이 볼 때 세상은 여전히 멀쩡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잘 굴러 가고 있는 세상에 어째서 생뚱맞게 부정적인 언사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느냐고 힐난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국민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힐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를 세우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책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모욕은 그런 조롱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 앞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한 그 사실 때문에 매 맞고 차꼬가 채여 갇히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포자기한 듯 탄식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9절)
오늘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으로 그 결론을 맺고 있지만, 사실 예레미야의 탄식은 그(9절)보다 훨씬 깊습니다. 문맥이 다소 이상하게 구성되어 있기는 한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 뒤에는 더더욱 심한 탄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20:14~15; 17~18)
거의 동일한 탄식으로 채워진 욥기 3장을 제외하고는 이처럼 신랄한 탄식을 성서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욥의 탄식과 예레미야의 탄식이 그 기원에서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탄식이 성서에 나오는 어떤 탄식보다 깊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삶의 가장 깊은 나락을 경험한 사람의 탄식입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운명에 대한 탄식만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뭐라 말했습니까? “나의 눈 앞에 언제나 보이는 것은,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뿐이다.”(6:7) 예레미야의 탄식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탄식이자 동시에 일상의 삶을 폭력에 휘둘려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는 탄식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예레미야의 탄식(또한 욥의 탄식)이 자신만의 고통에 대한 탄식이 지나지 않았다면, 그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4절 이하의 탄식은 실제로 자살하기 직전에 이른 절망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깊은 절망의 탄식 가운데 하나님께 항변한 그였지만,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삶의 깊이와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9)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조롱합니다. 그리고 그가 넘어지기만을 기대합니다(10절).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조롱을 이겨내고, 넘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다.’”(11~13)
예언자 예레미야가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 나와, 급반전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근본 사연, 그 근본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다.” 이 고백은 악인들의 폭력에 고통을 겪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 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언자의 삶이, 사람들의 조롱을 이겨내고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삶의 깊이, 삶의 무게, 그것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언자가 선포하는 말은 그 삶의 무게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말을 조롱하고 박해하지만,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듯이 나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내가 세상을 향하여 쏟아낼 수밖에 없는 말의 실체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신성모독이라 할 만큼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언자의 말의 무게는, 그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의 그 고통에 함께 하는 삶의 무게만큼 무거운 것입니다.
예언자가 자신만의 고통에 몰입하여 자기연민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결코 절망의 나락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이 이 땅의 숱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통감하였기에 그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또 다른 모습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그 희망을 이뤄주신다는 믿음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은 “내 형제들 곁으로 가야겠다”고 했던 전태일의 다짐,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누가 23:28)고 했던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특권층의 성범죄행위가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범죄가 횡행할까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의 상실이 근본 원인입니다. 피해자는 ‘성폭행’이라 주장하는데 그들은 ‘성상납’이라 주장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고 그저 노리개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는 데서 그와 같은 범죄행위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질러집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의 고통을 한 순간이라도 생각할 수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 범죄행위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면 그 범죄행위의 당사자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아예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암만 변호하지만, 누가 봐도 여성비하 발언이요 자기도취 행태로 보이는 언행을 일삼고, 반공주의 안보논리로 끊임없이 국민을 편 가르는 이가 한국교회 한 단체(이름하여 그 유명한 ‘한기총’)의 대표를 맡고 있는 현실, 그를 찾아가 여전히 구태의연한 안보논리를 내세우고 천만 기독교인을 운운하며 표를 달라고 야당 대표가 빌붙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들의 말을, 그들의 삶을 우리는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과 우리가 같은 기독교인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일상을 팍팍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의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지 의심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서 특정 종교인 ‘기독교인’일지는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 때문에 마음아파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다는 믿음,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마음과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과 믿음을 가진 이라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마음과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내 삶이 귀하듯 그 누구의 삶이든 또한 귀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 그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말로, 스스로 기쁨을 삼으며, 나아가 절망의 나락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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