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 욥기 42:1~6[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2-29 14:51
조회
28184
2019년 12월 2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본문: 욥기 42:1~6



딱 10년 전 2009년에 욥에 관한 책을 냈습니다.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이라는 책입니다.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를 통해 나온 두 번째 책입니다. 첫 번째 책이 <뒤집어보는 성서인물>이지요.
이제 이 교회가 딱 20년을 채우게 된 만큼, 그 의미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9년이면 교회가 10년 째 되는 해였고, ‘아, 이제 교회가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욥기를 공부한 해는 2005년이었습니다. 교회가 6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아! 교회로서, 목회자로서는 그 때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습니다. 새 천년 첫 주일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첫해는 ‘기대반 두려움반’에서 기대가 앞서 충족되어 고무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 후 예정에 없이 교회당을 갑자기 옮기면서 교회로서 응집력은 떨어지고, 이후 신생 개척교회가 겪어야 할 어려움은 모두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딱 3년간은 외부에서 지원이 들어왔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4년째부터는 그 지원마저 완전히 딱 끊어지면서 그나마 목회자 사례비도 정상적으로 지급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좋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생활에서의 압박감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빚은 늘어가고 신경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도 목사는 자기 꿈을 실현한다고 그러지만 동반한 가족은 뭐냐?’ 이런 볼멘소리가 나온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가만 보니 교회에서 욥기를 공부한 시점이 딱 그럴 즈음이었습니다.
사실 욥기는 감히 붙잡으려고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성서 가운데서도 가장 읽기 어려운 책이고, 그 내용 또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시 열심인 교우들 가운데 강력한 요청이 있어 욥기를 한 해 남짓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게 꼭 필요한 약이 되었겠다 싶어집니다.
참 오묘하다 싶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다소나마 가질 수 있을 즈음 도마복음서를 공부했는가 하면, 그 보다 앞서 스스로의 삶과 꿈을 두고 씨름하고 있던 시절 욥기를 읽었습니다. 이를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오묘합니다. 그만큼 더 생동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정황 가운데 있었던 셈입니다. 그 가운데 목회자로서 저 스스로의 영적 성찰도 하게 되었고, 동시에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해 올 수 있었습니다.
책을 냈을 당시 한 일간지 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때 받은 물음 가운데 첫 번째 물음이자 가장 중요한 물음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구약의 인물인 욥을 호출한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오늘도 그 물음의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궁지에 몰리고 고통스럽게 절규해도 그에 아랑곳없이 사회는 굴러갑니다. 예컨대 2009년 시점에 사회적으로 쟁점이 된 일은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사태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쪽에서 일어나도 이 사회는 굴러갑니다. 더욱이 그런 사태들은 법의 공정한 집행이라는 명분으로 촉발되었고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고 열심히 일을 해도 늘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10년 사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세월호 사건, 그리고 촛불혁명이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특별히 촛불혁명을 계기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이 달라지기를 기대하였지만, 여전히 큰 변화를 실감하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진실은 밝히 드러나지 않고,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욥기는 그렇게 부조리한 인간 현실에 대한 인간들의 오랜 물음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그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제기를 하며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찾도록 촉구합니다. 욥의 항변과 물음은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항변이요 물음입니다. 구약의 인물인 욥을 오늘 한국사회에 불러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욥의 항변과 물음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희망의 언어라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욥기의 사실상 결론으로서 그 희망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오늘 본문말씀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욥기 전체를 이해하는 관건이 됩니다.
흔히 기독교의 전통에서 욥은 인내와 순종의 표상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한 인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다는 것은 정당한 평가입니다. 그러나 욥은 오랫동안 기독교의 전통에서 이해된 바와 같이 단순히 인내하고 순종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신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욥은 그와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재가하신 듯이 여겨지는 현실의 질서에 대해 도발하고 항변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르기 전까지 욥은 그와 같은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결말, 곧 오늘 본문말씀에 이르러 욥은 이전의 태도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과연 오늘 본문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욥기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주인공 욥이 처한 처지를 다시 한 번 간략히 되돌아볼까요? 흠 없는 사람 욥이 느닷없이 곤경에 처합니다. 하나님 앞에 불경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고통을 겪습니다. 먼저 가진 것을 다 잃습니다. 소유의 완전한 상실입니다. 다음에 몸마저 완전히 망가집니다. 동시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습니다. 관계의 완전한 파탄, 곧 인격의 완전한 파탄입니다.
이러한 욥을 두고 처음에 위로하겠다고 나선 친구들이 뭐라고 합니까? 뭔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벌 받는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욥은 여기에 대해서 항변합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어떤 잘못을 범한 적이 없다고 욥은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욥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는데, 그 격론이 곧 욥기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요지부동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말합니다. 반면에 욥은 그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은 현실을 들어 그에 대해 반박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할까요? 친구들은 ‘착하면 복 받는다’,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합니다. 욥은 착한 사람들이 오히려 망하는 현실, 잘 믿어도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말합니다. 욥은 사람들의 믿음과는 다른, 그 상반된 현실의 부조리를 끊임없이 문제 삼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지적으로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면, 욥 자신은 지적으로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어느 편이 진실에 가깝습니까? 참으로 유감이지만, 욥이 말하는 게 우리 삶의 실상에 가깝지 않습니까? 정말로 부끄럽지 않게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난관에 봉착해야만 하는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결코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루고자 하는 일을 쉽사리 이루기 어려운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욥은 바로 그 난관 속에서 친구들의 허구적 논리에 맞서고 있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 욥 앞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에 욥이 응답하는 것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욥기의 사실상 결론입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지만, 그 이야기는 친구들과 욥 가운데서 누가 옳았는지 해명해 주는 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사실상 완전한 결론입니다.
<표준새번역> 성서는 이 대목의 소제목을 ‘욥의 회개’라고 붙여놓아 욥이 이전까지 취해 왔던 태도를 완전히 번복한 것처럼 오해할 소지를 주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역성경>이 ‘여호와에 대한 욥의 마지막 대답’이라 하고, <공동번역>이 ‘욥의 마지막 답변’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것이 훨씬 좋습니다.
여기서 욥은 우선 스스로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욥의 친구들이 다 안다고 설파했던 하나님과는 다른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했을 때 욥의 뜻은 친구들 주장의 허구성을 들춰내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욥 역시 자신의 경험과 인식을 절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욥 역시 하나님의 뜻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해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무지를 고백한 것은 욥이 그 위험성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욥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법칙에 매인 노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자유인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궤적을 보여주었고, 마침내 이 대목에서 그 가능성을 확신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에 관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어떤 중재자 없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편견없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존재, 하나님을 전한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을 보여주고 전하기보다는 왜곡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하나님을 빌미삼아 나를 속박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미망에서 벗어났습니다.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 번역은 이전에 욥이 뱉었던 항변 자체를 거두어들이고 그렇게 항변했던 것을 잘못이라고 뉘우치고 있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나는 먼지와 재를 포기하고 후회한다.”로 재해석될 수 있고, 이 말은 ‘먼지와 재’로 상징되는 신음과 한탄의 태도를 접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근본 태도를 바꾸겠다는 뜻이지 말을 번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에 신음하고 한탄하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태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더 이상 자신을 파멸의 상황으로 모는 어떤 구실이 될 수 없게 만드는 삶의 의지의 천명입니다.
이로써 욥기 대단원의 막은 내려졌습니다.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해명은 여전히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대변한 전통적인 지혜론에서는 그 인과관계가 명쾌하였지만 욥의 주장 가운데서는 그 인과관계가 전혀 가당치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뿐입니다. 욥기의 분명한 결론이 있다면, 고통의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자신을 파멸로부터 지킬 수 있는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따른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의 천명입니다. 욥기는 그렇게 고통 중에도 파괴될 수 없는 인간성, 그리고 동시에 소멸되지 않는 신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움에 대한 욥의 깨달음은 주어진 굴레에 매이지 않는 인간의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입니다.
소유의 상실과 관계의 파탄에 이르는 상황, 그야말로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도, 세파와 그 허구적 논리에 휘말리지 않고 하나님의 진실을 찾고자 했던 욥에게서,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참 인간을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는 진정한 인생찬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진실을 믿는다면 그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누구나 그 막바지에 이르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어떻습니까? 저마다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 형편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 그 자체에 일희일비하는 삶의 태도에 갇힌 인간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삶의 태도를 일깨워줍니다. 어떤 경우라도 내 삶이 무너져 내리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것, 끝까지 진실을 깨우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인생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본문말씀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지적 교만은 우리를 닫힌 세계에 내버려두지만 지적 겸손은 우리를 열린 세계로 인도합니다. 지적인 겸손, 그것은 깊은 영성과 통하는 길입니다. 다가오는 시간을 그 마음으로 맞이하기를 바라며, 그 가운데 저마다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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