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서 31] 소 여물통에 누워 있는 개(102~104절)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05-01 21:58
조회
1742
천안살림교회 2013년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3년 5월 1일 / 최형묵 목사



제31강 소 여물통에 누워 있는 개(102~104절)


10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재앙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소 여물통에 누워 있는 개와 같습니다. 자기도 먹지 않고 소도 먹지 못하게 합니다.”

10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어디로{어느 시점에 어디로} 들어올지 아는 사람은 다행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일어나 힘을 모아서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4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오십시오. 오늘 저희와 함께 기도하고 금식합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범했습니까?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신랑이 신방을 떠날 때 저들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에 실린 본문[김용옥, <도마복음 한글 역주 3> 참조]



102. (* 유사병행구: 마태 23:13, 누가 11:52)

* 소 여물통에 누워 있는 개: 이 이야기는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속담. 이솝 이야기에도 등장. 예수의 언행은 유대교의 정신사적 맥락에 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의 정신사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음. 예수에게 공유되고 있는 헬레니즘의 정신사적 전통을 주목할 것 같으면 예수의 언행은 견유학파 철학자들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 이 구절은 그 측면을 아주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경우. 이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도 유사병행구를 갖고 있지만, 도마의 이 구절이 속담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반면 유사병행구들은 보다 직설적(해설적)임. 또한 이 구절은 도마복음으로서는 드물게 바리새인들을 직접 언급하고 있는 경우로 39절과 유사함. 도마복음서는 특정한 부류의 오류만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오류와 동시에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을 강조한 까닭에 특정 집단을 비방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으나,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을 꼬집어 말하고 있음. 이 구절을 통해 보더라도 바리새인들이 진리의 걸림돌이 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임. 비유적인 이 이야기는 스스로도 진리의 깨우침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남들도 진리의 깨우침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꼬집고 있음.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진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의 행태. 오늘 그런 부류는 너무 흔하게 볼 수 있음. 진리는 독점의 대상이 아니라 개방의 대상. 교회의 강단은 목사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회중에게 개방되어야 할 것. “설교강단은 어디까지나 대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목사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대형교회일 수록 그런 착각이 심한데, 그런 목사님들은 모두 여기서 말하는 ‘여물통에서 잠자고 있는 개들’이다”(김용옥).


103. (* 유사병행구: 마태 24:43~44, 누가 12:39~40)

* 도둑이 어디로 들어올지 아는 사람: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구들은 종말론적 색채를 분명하게 띠고 있는 반면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그 색채가 분명하지 않음. 여기서 ‘어디로’(오강남)로 번역된 콥트어 단어가 시ㆍ공간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음(김용옥)에도 불구하고 도마복음의 이 구절이 종말론을 전제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려움. 도마복음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도둑은 외재적 대상이 아니라 ‘참 나’에 대한 깨달음을 가로막는 내적 욕망이라 할 수 있음. 곧 집에 도둑이 든다는 것은 영혼이 거하는 집에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뜻함. 그 도둑은 우리 몸의 가장 취약한 구석을 통해 침입. 그러므로 늘 그에 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


104. (* 유사병행구: 마가 2:18~20, 마태 9:14~15, 누가 5:33~35)

* 금식과 기도가 필요할 때: 다른 병행구들이 특정한 맥락에 배치되어 있는 반면 이 구절은 제자들의 요청에 즉답을 하고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음. 당시 형식화된 의례로서 금식과 기도를 하고 있는 집단은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 집단. 예수의 도반들 또한 그 관습에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줌. 6절과 14절에서 기도와 금식을 금했던 이유가 여기에서 분명하게 밝혀져 있음. 여기서 청유와 응답이 이뤄지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청유하는 제자들이 무척 무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예수는 종교적 의례가 행해지는 맥락의 바탕에 깔린 ‘죄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음. 예수는 바로 지금의 당신의 상태, 또한 바로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 제자들의 상황을 신랑이 신방에 있는 상황으로 말하고 있음. 하나님과의 합일을 결혼 또는 신방에 드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은유. 하나님과 진정한 합일의 경지에 있는 사람에게 종교적 의례로서 기도와 금식은 불필요하다는 것. 기도와 금식은 신랑이 신방을 떠날 때나 필요하다는 언급은 장차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보다는, 지금 그러한 때가 아닌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일갈하는 데 그 근본 뜻이 있다고 해야 할 것.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됨을 강조. 곧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


* 타력 구원을 믿는 ‘오만’과 자력 구원을 믿는 ‘겸손’: 도마복음을 공부하면서 떠오르는 현실의 아이러니. 전통적인 기독교가 인간의 한계를 강조한 반면 도마복음이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전통적인 기독교가 타력 구원을 강조한다면, 도마복음서는 자력 구원을 강조. 그런데 현실에서는 타력 구원을 믿는 이들에게는 ‘오만’이 두드러지고(소 여물통에 드러 누은 개 모양), 정반대로 자력 구원을 믿는 이들에게는 ‘겸손’이 두드러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왜 그럴까?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 또는 ‘이미 도달한 길’과 ‘멀지만 가야 할 길’의 차이 아닐까? ‘이미 구원이 성취되었으니 우리는 못할 것이 없다’는 인식과 ‘아직 구원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언제나 자기성찰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차이. ???



* 다음 제32강(5/8) 주제는 “양 한 마리의 의의”(105~107)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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