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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슬람, 편견을 넘어 '다시 보기' - 류성민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6-18 01:21
조회
2987
서평: <진보평론> 27 (2006. 봄)


칼 W. 언스트,『무함마드를 따라서--21세기에 이슬람 다시보기』, 최형묵 역, 심산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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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민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1.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국가 권력과 언론의 폐해를 지금 한국 사회는 실감하고 있다. ‘이익’을 쫒는 그것들의 속성이 또 어떤 변신을 꾀하며 국민 대중을 현혹할지 두려울 뿐이다. 그래도 항상 ‘진실’을 외치고 ‘속임수’를 드러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어 때론 다수를 잠깐이나마 진실 쪽으로 다가오게 하며 때론 대중의 자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된다면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을 보고 난 후 소감의 일단이다.

또 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8년 전 독일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우리 일행을 초대한 독일 사람들은 처음으로 한국인들의 방문을 받은 것이었고, 우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라 걱정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음식과  잠자리 등 생활습관이 많이 다를 것이라고 예상하며 나름대로는 잘 대우해 주려고 무척 고심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우리를 초대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사람입니다.” 그들은 박장대소하며 좋아했다. 모든 걱정이 가셨다는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고 이야기하고 함께 지내면서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도 인간이라는 명제로 시작한다.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성찰할 수 있다고 본다.


2. 종교학자들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종교는 살아있는 실재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듯이 종교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 혹은 어떤 곳에서 보고 느낀 것만으로 종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시간과 공간을 전제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전체를 말하려고 한다면 너무 쉽게 왜곡에 빠지거나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 오랜 역사를 지녔고 여러 나라에 퍼져있는 종교들에 대해 한마디로 어떠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적절치 못하다. 사람들은 불교는 어떻고 기독교는 어떻다고 말하지만 그런 말들은 대부분 단편적이거나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그런 말들에 대해서는 항상 ‘다시 보기(reviewing)' 혹은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가 필요하다. ‘종교(religion)’라는 말의 어원 중 하나가 ‘다시 읽기(relegere)'라는 라틴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다시 읽기’이다. 서구 사회에서, 서구의 국가 권력과 언론, 그러고 그것들에 영합한 세력들이 이슬람을 얼마나 고의적으로 왜곡했는지, 얼마나 무식하게 침소봉대했는지, 얼마나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는지를 여실히 까발리고 있다. 그런 다음 있는 그대로 ‘다시 보기’를 한 것이다. 아직도 이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체 없이 이 책을 보기 바란다.

        - 이슬람은 아랍인들의 종교이고 중동에만 있다.

        - 이슬람은 전쟁과 테러를 조장하는 종교이다.

        - 9·11 테러는 이슬람이란 종교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 이슬람을 믿는 남자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있다.

        - 이슬람에서는 모든 여자들에게 베일을 쓰게 한다.

        - 이슬람 사회는 남자 중심적이다.

        - 이슬람은 학문과 과학의 발전에 저해되는 종교이다.

        -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이고 처음부터 원수였다.

        -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도둑의 손을 자르고 간통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인다.  

이슬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대부분 잘못된 것이거나 아주 부분적으로만 맞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너무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 ‘다시 보기’는 잘못 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고 동시에 정확하고 진실하게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다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슬람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다. 한 권의 책으로 1,500년의 역사를 지닌 이슬람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두드러지게 잘못 본 것을 다시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렇게 잘못 본 사람들이 미국인을 비롯한 서구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도 전혀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듣는 것의 대부분이 서구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를 사생아라고 말하고 기독교인을 식인종이라고 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기독교인들에게 이보다 더 모욕적이고 왜곡된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견될 수 있는 말들이 이슬람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중세 기독교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밝히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범이고 최후의 완전한 예언자이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 작가들은 그를 악마의 아들로 그리기도 했고, 그의 예언이 간질이란 병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술과 돼지고기는 이슬람에서 금기하는 것인데 무함마드가 술에 취해 죽었다거나 돼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다시 보기’를 주저하거나 꺼리다보면 우리들도 그러한 터무니없는 거짓과 속임수에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다시 보기’를 통해 정확하고 진실 되게 말하고 있는 것 중 몇 가지는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아니 읽도록 권하기 위해서라도 간단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전 세계 무슬림 인구가 약 13억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 천주교 인구가 약 10억 명, 개신교 인구가 약 4억 명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수가 지닌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 무슬림 인구 중 아랍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불과 18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의 나라들에는 각각 1-2억 명의 무슬림이 있다. 이집트, 이란, 터키, 나이지리아 등에도 6천만 명 이상의 무슬림이 있고, 중국에 3천만 명, 미국에 500만 명, 유럽에도 1천만 명의 무슬림이 있어 이슬람이 가히 세계적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50개 이상의 국가들에서 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최대 종교이다. 결국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다시 보기’가 필요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이다. 어떤 종교이든 그 창시자에 대해 최상급의 표현으로 칭송하지 않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와 관련해서도 다소 믿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일이나 신비화된 이야기도 많다. 그렇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점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인류 역사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서기 570년에 태어나고 632년에 죽은 예언자 무함마드는 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후 아라비아 반도에서 처음으로 모든 부족들을 망라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를 통해 민족과 인종, 성(性), 지역, 신분을 넘어서는 사랑의 윤리가 주창되었고, 새로운 사회 구조가 만들어졌으며, 전 세계 모든 무슬림이 함께 지향하는 성스러운 시간과 장소가 획정되었다. 그의 말과 행위는, 지아비로서든 아버지로서든, 정치적 지도자로서든 혹은 예언자로서든 모든 무슬림의 모범이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 정도의 영향을 미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링컨이나 아인슈타인, 처칠, 고르바초프, 이순신, 보아, 배용준보다 그들 잘 알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은 아닌지.

대다수 이슬람 국가들이 유럽 제국들의 식민지였고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아직도 그 상흔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하는 사실은, 특히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동일한 침탈을 당한 우리가 ‘다시 보기’를 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18세기 말엽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하기 시작하여 20세기 전반까지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90%가 식민통치 하에 있었으며, 그 기간 동안 정치와 경제에서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것들이 강제되었다. 그로 인해 정치적 혼란과 경제파탄, 문화적 약탈 등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이슬람 국가들이 감내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 오히려 이슬람이 더 넓은 세계로 진출하면서 20세기 최대 성장 종교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다시 보기’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세계적 종교로 성장한 이슬람도 지역에 따라 혹은 분파나 종파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사실도 ‘다시 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슬람 발생 초기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적 형태의 무슬림도 있고 서구적 사고와 의식을 많이 수용한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 무슬림들도 있다. 전쟁과 테러도 이슬람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집단도 있는가 하면 자선과 봉사를 최대 의무로 알고 있는 지극히 평화적인 무슬림도 있다. 여성에게 전신을 가리는 옷을 입게 하는 곳도 있고 의복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곳도 있다. 물론 그러한 극단 사이에 무수히 많은 입장과 태도들이 있다. 이 책을 조금만 읽어도 어느 한 모습만으로 이슬람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편견이고 왜곡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기에 거듭 다시 보기를 해야 하는 것이 종교로서의 이슬람 문화와 예술이다. 사실상 우리나라에도 이슬람이 지나치게 전투적인 이미지로만 알려졌고, 그런 뉴스거리가 이슬람에 대한 관심의 거의 다였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표현한 “한 손엔 꾸란을, 다른 한 손엔 칼을”든 전사의 모습으로 무슬림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이야말로 전교조를 공산당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과 같은, 이슬람에 대한 메카시즘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은 종교로서 오랜 역사 속에서 무슬림들의 삶과 문화를 형성하게 해 주었고, 그 신앙은 다양한 문학과 예술로 표현되었다. 종교적인 영적 생활을 지향한 공동체들이 이슬람 초기부터 생겨났고, 수피즘으로 알려진 이슬람 신비주의는 일반 대중들의 종교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그리고 아라베스크로 불리는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과 서예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성스러운 꾸란 구절들, 그리고 그런 것들로 장식된 무수한 모스크는 이슬람 종교 문화와 예술이 낳은 인류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유럽인들이 유럽의 누드모델을 활용하여 그린, 수많은 나신의 여인들로 가득 찬 욕실 그림을 이슬람 회화의 대명사로 여긴다거나, 뭇 남성들 앞에서 배꼽춤을 추는 무희를 상상하면서 이슬람 문화에 다가가려 하는 것은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 것과 같다.


4.  “종교에 관한 모든 주장은 그 정치적 함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36쪽)는 저자의 말은 이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회상되었다. 이슬람에 대한 악의적 왜곡과 날조는 사실상 정치적 야욕을 가리기 위한 술수인 경우가 많았고, 다른 종교들이나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전통적 종교들을 ‘유사종교’라고 폄하한 일제, 원시종교들을 ‘미신’으로 치부했던 식민 침략자들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 책을 보면, 정치인들의 종교적 발언과 종교인들의 정치적 발언은 반드시 ‘다시 보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최근 번역된 브루스 링컨의 『거룩한 테러: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관한 성찰』(김윤성 역, 돌베개 출판사)은 이 책과 더불어 정치인의 종교적 발언과 종교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다시 보기’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책은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준다.


5. 끝으로 이 책의 기술방식, 그리고 번역과 관련된 평가를 하고자 한다. 이 책은 이슬람에 덧칠해진 것들을 걷어내어 본래의 모습을 보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보니 덧칠한 부분만을 걷어내고 그 밑에 있는 것을 기술하고 해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더군다나 서구에서의 덧칠에 치중함으로써 우리의 독자들에게까지 공감을 얻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따라서 이슬람을 체계적으로,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이 책이 충분치 못하다고 본다. 적어도 이슬람 전문 학자들에 의해 저술된 이슬람 입문서라도 몇 권 더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오히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권 정도 추천하자면, 『이슬람 입문』(김정위 저, 한국외대 출판부, 2001)와 『마호메트 평전』(게오르규 저, 도서출판 초당, 2002)을 들 수 있다.

아울러 독자의 한 사람으로 이 책의 번역을 기뻐하면서 역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러한 좋은 책을 발굴하여 번역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역자의 혜안과 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역자가 한국의 개신교 신학자요 목사라는 사실은 모든 독자가 의미 있게 여겨야 할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느 종교를 믿든 혹은 종교를 믿지 않는 간에, 다른 사람과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함께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양함이야말로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현대에 와서 보다 분명히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혜를 얻는 길은 올바른 이해에 있다고 본다. 이 책도 그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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