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세상을 사랑하사 - 요한복음 3:16[유재무 목사]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7-05-14 20:05
조회
5451
2017년 5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세상을 사랑하사
본문: 요한복음 3:16

유재무 목사(<예장뉴스> 편집인)

성경전체를 한절로 줄인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 귀절을 듭니다. 너무 익숙하고 잘알려진 말씀이기에 새로울 것도 없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저는 이 말씀에 다시 한번 감동하며 그 의미들의 실천을 위하여 제 후반기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림으로만 보던 천안살림교회에 초대를 받아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최형묵 목사와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걷는 민중신학의 도반으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민중신학계의 제 2세대 주자로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반가운 신학의 동지입니다.

저는 지금은 예장뉴스라고 하는 예장 통합 교단을 배경으로하는 작은 인터넷 신문을 운영합니다. 그리고 저는 년전 까지만 해도 1983년에 제 고향 뚝섬에 성수삼일교회의 살립자로 동역자로 설교를 했습니다. 지금은 매주 설교를 하지는 않고 있는 데 오랜만에 강단에 섭니다.

우리는 갖고 있고, 아는 것만을 주고 전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안에서라며 우리가 체험하고 느끼고 갖고 있는 것만 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이고 사랑을 하자고 하고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줄 사랑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회나 목회자들이 가르쳐온 요3:16이 오늘 이 땅에서 살아역사하는 말씀이 되게 할 것인가? 가 제 설교의 결론입니다. 우선 이 말씀을 문자대로라면 본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통하여 교회와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교회(교파)의 조직이나 논리 행태를 통하여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World)을 통하여 교회나 사람과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지 교회와 교파, 직제, 교리에 관심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의하여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원은 한 목회자, 한 교회나 교파에 메몰되고 종속된 신앙에서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한 교회에 충성하고 순종하는 협소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논하는 사랑은 성경적인 주제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C.S 루이스가 “인간은 에로스(육체)에서 태여나고 스톨게(혈육) 로 성장하고 필로스(우정)에서 성숙하고 아가페(신의 사랑)에서 완성된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성경적인 것만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없습니다. 모든 사랑이 귀하고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기독교나 사랑이 결립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면 의미없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무언가 다릅니다. 얼굴의 표정과 몸짓이 다릅니다.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야 합니다. 살림교회가 이곳에 이사를 오신지 얼마되지 않는 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지역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언제가 그런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런 때를 준비하고 기다리십시오. 교회의 부흥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다 기한과 때가 필요합니다. 다만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역사의 담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에릭프롬이라는 분이 Love is Art 라는 책에서 사랑를 5개로 정의한바 있는 데 1. 관심, 2, 존경, 3.이해, 4. 책임, 5. 주는 것이라고 한바 있습니다. 더 긴 설명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이분이 사랑을 “아트” 라고 한 점이 새롭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놀라운 일이나 기이한 일을 보고 “예술”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예술목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술에 대한 감동은 억지나 강요가 아니라 그대로를 보고 감동과 감흥이 나는 것 처럼 말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진짜 한번 멋찌게 하고 싶지 않습니까? 이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럴 때에 이 교회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때로 교회와 목회자들의 문제를 기사화하고 고발의 글을 자주 쓰지만 저의 본심은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젖을 주고 밥을 주고 돈을 주는 것 처럼 참견과 매를 줍니다. 저는 그런 마음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망신도 당하고 그렇게 하면 될일도 안된다는 사전교훈과 학습을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마치 캄캄한 밤에 길을 인도하는 가로등이고 바다의 등대이고 복잡한 도로의 신호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앞을 볼 수 있고 서로를 알아보고 질서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디여 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자유보다 신장되야 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입니다. 언론은 법이나 국가가 통제해서는 안됩니다. 독자들이 세상이 그것들을 구별합니다. 살아남는 것은 필요해서이고 없어지는 것은 도퇴되고 버림받는 것입니다.

저희 교단에서는 내년 총회에서는 매년 총회의 주제를 정하는 데 내년에 이 말씀으로 하여 “교회, 세상속으로” 라고 정한다고 합니다. 이 일에 저도 일조를 했습니다. 최근 “마을목회” 라는 주제로 저희 동역자들이 열심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마을 목회는 그동안 전도와 구제의 대상인 세상에 대하여 게급장 떼고 나가야 합니다. 목사가 이장을 맡고 사모가 부녀회장을 하는 교회도 나왔습니다. 그러기 까지 인내하면 가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하던 방식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이제 농촌마을에서는 교회가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을이 사느 냐? 죽느 냐?의 문제입니다. 그동안 농촌이 사람을 낳고 키우고 먹이고 살게 했습니다. 이제 다시 살림의 신학으로 구체화해야 합니다. 한국신학 주제도 민중에서 생명으로 갔는데 이제는 “살림” 으로 가야합니다.

최형묵 목사가 이런 신학의 담론을 구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살림의 반대는 죽임입니다. 죽임의 문화를 거두워내고 살림의 영이 이 땅의 모든 약한 것과 바른 것을 구원하고 살려내야 합니다. 그런 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말씀을 아는 것과 사명을 깨닳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서구신학은 신의 존재증명에 오랫동안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학자들은 더 이상 신의 존재증명이 아니라 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 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관심갖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과 자연, 생명의 살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목회자들도 직업으로의 목회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목사들도 이제는 사명과 존재로써의 목회가 필요할 때입니다. 살림교회의 교인들이 되신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특히 이 민족의 아픔과 죽음의 역사 37년을 맞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뜻깊은 예배가 된 것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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