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의 갈망이 이뤄질 때까지 - 누가복음 11:5~1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21 13:55
조회
5390
2017년 5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우리의 갈망이 이뤄질 때까지

본문: 누가복음 11:5~13

 

날이 참 가뭅니다. 이런 때 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기우제라도 드려야겠다고 합니다. 다 아는 이야기일 겁니다만, 특별히 기우제의 효험이 뛰어난 종족이 있다고 하지요. 인디언들의 기우제는 꼭 통한다고.^^ 그 이유도 다 알 겁니다.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니까요. 끝장 볼 때까지 간절히 염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를 일러 하늘이 감동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하늘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일러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의 비유와 그 비유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 오늘 본문말씀은 그 의미를 깨닫는 데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빵을 꾸어달라고 하면 친구가 그걸 거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이 비유에는 매우 구체적인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밤중에 갑작스럽게 여행하던 친구가 찾아 왔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웃에 사는 딴 친구의 집을 찾아 먹을 꾸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사정이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친구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먹을거리를 찾아내려면 부스럭대는 소리에 이미 잠든 가족들의 잠을 깨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친구가 그 요청을 거절하겠느냐는 것이 비유의 초점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한마디로 기도하는 방법을 일깨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하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기존의 교회에서 너무 자주 선포되는 의미, 그 이상 어떤 의미를 과연 지닐까요?

 

최초의 종교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스위스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레온하르트 라가츠 목사(1868~1945)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두고 흥분해서 말합니다. 라가츠 목사는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도 예수의 비유가 지니는 혁명성에 비하면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레온하르트 라가츠는 모든 비유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고 보았는데, 오늘 이 비유와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고, 그들의 강한 적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는가?” “예수는 그들에게 기도라는 초강력 무기를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도가 과연 ‘초강력 무기’가 될 수 있을까요?

 

‘열심히 기도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렇게 집약되는 오늘 본문말씀이 함축하는 두 가지 초점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비유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마치 친구에게 조르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 주목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우리가 굳이 그렇게 소란스럽게 간청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굳이 그렇게 친구에게 간청하듯 기도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고백하고 가르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근엄한 초월자 또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개입해 들어와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를 자녀로 대해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를 나누시며 우리의 삶을 염려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그렇듯이 그 하나님은 때때로 친구처럼 우리를 대하시기도 합니다. 내 삶의 감독자가 아니라 내 삶의 동반자 하나님입니다.

기도는 그 하나님과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내면화합니다. 우리의 삶의 지표를 확인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합니다. ‘친구에게 조르듯이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 대화를 쉬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통 없는 부모 자식 관계, 소통 없는 형제자매관계, 소통 없는 친구관계, 그것은 이미 관계가 아닙니다.

소통 없는 관계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한 파국에 이르는지, 그러나 정반대로 원활한 소통이 얼마나 기쁜지 또한 더불어 어떤 삶의 희망을 불어넣는지 지금 우리는 바로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그러면 받을 것이다’ 하는 말씀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구하면 무엇이든지 받을까요? 이 대목에서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에 앞서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매주일 기도드리는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이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을 알려 주시는 말씀이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그 기도를 드리는 태도를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의 기도의 첫머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적인 기도는 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주기도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첫머리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뭘까요? 말 그대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먹을 것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진정으로 삶답게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모든 조건을 말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신발, 집, 정원, 경작자,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 충족을 위해 무한정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그 일용할 양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일용할 양식마저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파탄으로 인한 궁핍과 결여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 다음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우리가 흔히 ‘빚진 죄인’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주기도문의 이 대목에서 ‘죄’를 ‘빚’으로 바꿔 읽어도 됩니다. 아예 그렇게 번역한 성서번역본도 많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관계의 회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누리는 삶으로, 파탄 난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적인 기도를 드리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한한 사적인 욕망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는 사람들의 관계 회복 안에서의 개인적인 삶의 향유를 위한 기도를 드릴 것을, 주기도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울 것 없습니다. 내 자식이 일등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면 모든 자식들이 공부 잘 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내 자식이 일등 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딱 한 사람에게만 응답될 수 있는 기도지만, 모든 자식들이 공부 잘 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모든 사람에게 응답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바라는 바를 되묻고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을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별됩니다. 기도가 하나님 나라의 열망을 이루는 ‘초강력 무기’가 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대의를 위한 기도가 개인적 소망을 이루는 기도보다 앞서고 그것이 결국은 개인적 소망을 또한 이루는 길이 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충분히 실감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통치행위와 일수일투족이 이렇게 큰 감동을 자아낸 적이 있었을까요? 후보 때는 답답한, 그러나 든든한 고구마라 불렸는데, 대통령이 되니까 사이다가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조마조마하는 가운데 잘못되면 안 되는데 하는 염려가 없지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많은 국민들이 기대를 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저마다의 삶 또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것이 단지 한 순간에 한 통치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뤄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짧게는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이어진 촛불항쟁, 길게는 1980년 광주항쟁,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는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있었기에 그 기대가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갈망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기도의 여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끝내 그 너머에 삶다운 삶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되었고, 마침내 하나하나 실현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만...

 

SNS에서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마침 광주항쟁 37주년을 맞아,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소설에 대한 작가의 인터뷰 기사였습니다. 그 소설을 쓰게 된 모티프를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져온 광주 사진집을 본 후 충격과 그 이듬해 12살 시절에 읽은 스웨덴의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 겹친 것이 그 소설을 쓰게 된 모티프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보면서 이런 의문을 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이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95010.html#csidxce79bb8b4a71aa3b2cd15f4b7f36d1f)

이 이야기를 접하는 순간, 저는 ‘어떻게 그렇게 폭력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삶이 가능할까?’ 하는 물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1980년 광주’의 제대로 통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말씀나누기에 익숙한 교우들은 너무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떠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현실을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비관론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현실 너머에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사실은 제가 믿는 바로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낙관적 기대가 없다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 또한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현실을 넘어서는 희망과 기대, 그것이 주기도문이 일깨주는 내용이요, 예수께서 혼신을 다해 선포하시고 보여 주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침내 그 나라가 이뤄질 때까지 기도하라고 일러 주십니다. 그 믿음으로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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