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과시와 지배의 욕망을 넘어 - 창세기 11: 1~9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6-06 12:15
조회
5657
2017년 6월 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과시와 지배의 욕망을 넘어
본문: 창세기 11: 1~9

오늘 본문말씀은, 아주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본래 ‘신의 문’을 뜻함과 동시에 ‘바빌론’을 지칭하는 ‘바벨’은, ‘혼란’을 뜻하는 ‘발랄’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쌓은 탑을 ‘바벨’이라 하고 거기에서부터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성서 기자의 일종의 말장난은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비판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본문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벨 탑 이야기는 인간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그 문명의 밑바탕의 동기를 이루고 있는 부정적인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본문말씀의 줄거리는 수많은 민족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흩어져 살게 된 원인을 전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른바 원인론(原人論)적 설화의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속뜻은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와는 다른 훨씬 깊은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자주 접하는 이런 이야기를 대할 때 그 표피적 의미에만 주목하게 되면 그 심층적 의미를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표피적 의미가 아니라 심층적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심층적 의미에 접근하고자 할 때 그 중요한 기본성격은, 이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상징적 소재가 바벨  탑이라고 한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추정해볼 때 고대근동 문명의 중심지인 바빌론을 향한 고대인들의 시선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서양 속담 가운데 “하나님은 시골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그 위에 인위적인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으로, 인간의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새겨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도시문명의 특징이 무얼까요? 오늘 본문말씀에 담긴 두 가지 초점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인위적인 규격화입니다. 예전에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 있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네모난 세상’. 모든 것이 직선과 네모로 구성되어 있는 곳이 도시입니다. 도로도, 건물도, 집도, 방도, 교실도, 책상도, 차도, 그 기본형을 그리자면 직선과 네모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원래 세상은 네모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모두가 둥글게 되어 있고,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적 현상은 모두가 꼬불꼬불하게 보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직선과 네모는, 인간의 편의에 따른 인위적인 획일화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 벽돌을 굽고 탑을 쌓았다는 것은 바로 그 인위적인 조작의 상태를 말합니다.
창세기 4:17이하는 가인의 후예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성을 쌓고 가축을 기르고, 구리와 쇠를 다루어 온갖 기구를 만든 인간 문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문맥에서는 그 사실을 딱히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그와 달리 명백히 비판적인 시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문명이 지니는 어떤 위험성이 명백히 감지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통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획일적인 규격화가 지니는 편의성을 넘어서는 그 어떤 위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도시문명이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은 그 공간의 형태가 인위적이라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그것이 상징하는 또 다른 인위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인간관계, 사회질서까지도 인위적이고 규격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까지도 그와 같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을 하거나 등교를 해서 일사분란하게 정해진 자리에서, 서열에 따라 맡겨진 일을 보고 다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차편을 이용해 들어오고 나가는 생활이 되풀이됩니다.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을까요?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네모난 탁자에서 밥을 먹고 네모난 가방에 네모난 도시락을 넣고 직선으로 뻗은 길을 따라 네모난 차를 타고 네모난 기둥이 우뚝 선 교문 앞의 네모반듯한 규율부 앞을 지나 역시 평평하고 네모난 운동장 한 켠을 직각으로 꺾어 들어가 네모난 책상에 앉아 네모난 칠판을 바라보며 ... ^^ 그것이 도시적 삶, 도시문화의 실체입니다. 말하자면 규격화된 시공간 안에 규격화된 인간적 질서가 자리하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획일적인 규격, 다른 말로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이, 도시공간이 상징하는 인위적인 시공간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도시문명의 심층적인 욕망과 그것이 지니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말씀의 두 번째 초점이요, 심층의 진정한 초점입니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가운데 높이 쌓아진 탑은 인간의 자기과시적 욕망을 표현하며, 나아가 종국적으로는 일방적인 지배로서의 권력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인간의 문명이 지니는 심층적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지적하며,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합니다.
현대사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서가 기록된 고대사회에서 이와 같은 권력은 더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대의 모든 권력은 노골적으로 예외없이 신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자처했습니다. 모든 왕들은 신의 대변자로, 또는 화신으로, 아니면 왕 자체가 신으로 받들어졌습니다. 그와 같이 받들어진 권력자는 자신의 욕망을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강요합니다. “짐의 말이 곧 법”입니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강좌를 통해 이미 함께 살펴봤지만, 성서의 신앙 세계를 형성한 주인공들이 신물 나게 경험한 것이 바로 그러한 현실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바빌론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의 여러 도시국가들에서 그와 같이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현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신물 나게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분열과 갈등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가치관을, 자신의 언어를 유일한 기준으로 제시하고 그 기준하에 모두가 통합되기를 바라지만, 그 결과는 거꾸로 분열이요 흩어짐입니다. 하나의 가치관에 의한 통합은 획일화를 의미할 뿐 진정한 통일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 하나의 가치관에 의한 강제적 획일화는 필연적으로 분열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양한 언어의 기원에 관한 오늘 본문말씀의 증언은, 단지 다양한 민족 언어들의 다양성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통 부재의 단절된 언어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위적이고 획일적인 하나의 언어가 지배할 때 그 다양성이 훼손되고 소통이 불가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표층적 의미와는 다른 심층적 의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명백히 이 이야기와 대조되는 신약성서 사도행전의 증언을 생각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오늘이 마침 성령강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만, 바로 성령강림의 사건을 전하는 사도행전 2:1 이하의 말씀이 어떤 내용입니까?
도처에서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이 그 모인 자리에 있는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의 말로 선포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갈릴리 사람들이었던 사도들이 하는 말이 그곳에 모인 여러 다른 출신지역의 언어들로 들렸습니다. 바대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 사람, 유대 사람, 갑바도기아 사람, 본도 사람, 아시아 사람, 브루기아 사람, 밤빌리아 사람, 이집트 사람, 구레네 사람, 리비아 사람, 로마 사람, 크레타 사람, 아라비아 사람이 모두 저마다의 말로 알아들었다고 했습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사건, 그것이 곧 성령강림 사건이었습니다. 다양한 언어의 존재와 그 정체성의 인정이 진정으로 하나 되는 길이며,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 원하는 바가 그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대비되는 이 두 이야기는 진정으로 하나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진정으로 하나 되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강요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 다른 언어를 보장하고 존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이자 동시에 환경주일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한꺼번에 생각하도록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마침 지난 주 강좌 주제가 ‘욕구의 충족’이 아닌 ‘필요의 충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필요의 한계를 넘어선 욕망의 충족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무한한 욕망의 충족, 그것도 물질적인 욕망의 충족을 부추기는 오늘의 자본주의적 삶이 지니는 문제를 같이 생각했습니다. 또한 자기과시적 욕망의 추구가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키는지 이 시간 새삼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자연의 파괴와 더불어 인간 삶 자체의 파멸로 인도할 뿐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 인간들의 삶 가운데서 인간과 자연을 되살리는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역사를 뜻합니다. 과시적 토건사업이 죽여 버린 물과 생명, 큰 것과 우뚝 솟은 것을 지향하는 토건사업과 같은 욕망의 결과로 부정된 작고 미약한 존재들을 회복함으로써 온전한 생명을 회복하도록 하는 사건,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가 우리들 삶 가운데서 그 사건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건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명 본연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그 음성을 듣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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