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 마태복음 22:1~1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6-25 16:25
조회
8100
2017년 6월 2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본문: 마태복음 22:1~14

오늘 우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심히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본문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누누이 이야기합니다만,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읽을 때 심심치 않게 의문의 상황에 부딪힙니다. 원래 간결했던 비유가 알레고리화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대하면서 가장 의문이 드는 대목이 마지막 구절일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 말씀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하나하나 파헤쳐 볼 작정이니,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의 요체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14:15~24)에도 동시에 전해지고 있는 이 비유는 세부적인 내용에서 다소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큰 줄기에서 보면 공통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마태복음 본문이기에 우선 마태복음의 본문을 따라 그 의미를 헤아리고자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왕의 이야기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왕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신하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신하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도무지 시큰둥합니다. 아예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까운 사람이 잔치에 초대해도 다른 일에 우선해서 잔치 초대에 응하는 것이 상례인데, 지체 높은 왕이 초대했는데도 사람들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의외의 상황입니다. 한 사람은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떠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아예 왕의 신하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입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왕은 분노해서 살인자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립니다. 왕은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자격이 없음을 개탄하고, 신하들에게 명하여 네 거리로 나가 아무나 잔치에 불러 오라고 합니다. 신하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아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옵니다. 그래서 혼인잔치는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일단 여기까지가 본래 비유의 요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비유 다음에 좀 묘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왕이 손님들을 만나러 가서 보니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밖으로 내쫓고 맙니다. 아니,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 왔으면 예복을 입지 않은 게 당연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는 딱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그렇게 초대받은 사람들이 예복을 수여받았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과연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비유란 원래 매우 간결한 함축적인 의미를 던져주는 이야기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도 애초 매우 단순한고 간결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우리가 비유를 대할 때 어려운 점은, 오늘날 성서에 기록된 비유의 내용이 예수님의 시대를 지나 초대교회의 시대로 옮겨져 해석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한 의미를 지닌 이야기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바뀐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그와 같은 변형의 흔적을 지닌 전형적인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마태복음 전하는 이 비유의 골자가 뭘까요? ‘왕이 혼인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러나 먼저 초대 받은 사람은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자기 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아무나 잔치자리에 오게 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비유의 본래 골자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증거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잔치자리로 비유됩니다. 잔치자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요 동시에 실재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쁨의 잔치, 기쁨의 축제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제 당신의 삶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께서 증거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데서 각기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아주 단순한 두 가지 사실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한편의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초대에 응하지 않은 반면,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애초 초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그 잔치 자리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요? 아니 이렇게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비유에서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밭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 장사를 하러 가야 하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뭔가 자기 소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일이 바쁜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잔치자리를 누리게 된 사람들은 그저 길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입니다. 길거리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모두 어중이떠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악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하는 표현은 자기 몫이 뚜렷하지 않은 불특정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아예 분명하게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자들과 눈먼 사람들이라고 그 대상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도저히 잔치자리에 초대받기가 어려우리라 예상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의 상황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유대 사회 지도층들은 예수를 배척한 반면 가난하고 천대받는 민중들은 예수의 초대에 적극 응한 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한편의 사람들은 축제에 응하지 않고 한편의 사람들은 축제에 응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야말로 잔치의 삶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쁨의 축제를 누리고 형제자매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나누는 삶입니다. 이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삶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삶이 진지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항상 엄숙하고 심각한 일에 매여 있습니다. 결혼 잔치에 가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들로 늘 분주한 사람들입니다. 이 삶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일보다 기쁨을 누리는 일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기존의 질서 안에서 주어진 일을 맡는 것보다는 전혀 새로운 삶의 환경에서 직접적인 형제자매애를 나누는 것을 진정한 기쁨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실상을 전하며 지금 완고한 지도자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 비유의 요체를 대개 파악하였지만, 사실은 이보다 훨씬 간결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 도마복음의 말씀을 보면 그 뜻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6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님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잔치가 준비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손님들을 초청했습니다. 종은 처음 사람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이 말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 몇이 내게 빚을 졌는데, 그들이 오늘 저녁에 오기로 하여 그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기에 가봐야 하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종은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집을 사서 하루 종일 나가 있기에 시간이 없네.’ 종은 또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이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결혼하게 되어 내가 피로연을 준비해야 하기에 갈 수가 없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종은 다른 손님에게 가서 ‘제 주인이 손님을 초청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손님은 말했습니다. ‘나는 밭을 샀는데 세를 받으러 가야 하기에 갈 수가 없네. 부디 저녁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하게.’ 그 종은 돌아가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께서 잔치에 초청한 사람들이 모두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실례를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네가 보는 사람은 모두 데리고 와서 내 잔치에서 먹게 하라.’ 장사하는 사람들[거래인들]과 상인들은 아버지의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 비유는 거의 모두 알레고리화되어 있고, 알레고리화되어 있는 비유의 의미는 대개 종말론적 전제를 갖고 있는 반면에 도마복음에서는 비유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말론적 전제 또한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의 비유는 공관복음서의 다른 병행구들과 확연히 비교되는 도마복음의 비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비슷한 것 같지만 상황설정과 주인공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미리 잔치 초대를 하였으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이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 역시 그 상황 설정은 유사하나 잔치초대의 주체가 어떤 임금으로 되어 있고, 더욱이 나중에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도마복음의 이야기는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합니다. 한편 다른 병행구들이 미리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무례한 사람들을 말하는 데 반해 도마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잔치를 벌여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나 누가의 병행구에서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도마복음에서는 상식적으로 볼 때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은 바로 여기에 비유의 본래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마복음의 비유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일상적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저마다 사연이 있어 갑작스러운 초청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청대상들이 흥미롭습니다. 이들은 말미에 거래인들[사업가]과 상인들로 일컬어지는데, 구체적으로 사채업자, 부동산재테크로 한몫 본 사람, 웨딩홀사장, 농장지주 등입니다. 사회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들의 아주 일반적인 상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충분한 교양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들의 약속위반 또는 무례함을 질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성실하고 일상적인 삶이 ‘아버지의 곳’, 곧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삶의 잔치, 진정한 진리의 깨달음과는 먼 사람들, 일상적 삶에 성실하지만 멈춰 서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 실제 예수운동에 무심했던 이들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래 비유는, 잔치에 미리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무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일상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고 충분히 교양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 비유는 본래 그 삶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만큼 그 적용의 폭 또한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 비유가 초대교회 상황에서 여러 가지 요소를 반영하며 조금 달라졌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비유의 상황을 유대인과 이방인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지만 오히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서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요소들을 설정하였습니다. 예컨대, 왕이 신하를 두 차례나 보냈는데 그 신하들을 사람들이 죽였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여러 예언자들을 보냈는데 그들의 선포를 외면하고 박해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왕이 그들을 벌했다는 것은 주후 66~69년에 걸친 유대전쟁에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된 상황을 반영합니다. 덧붙여진 예복에 관한 이야기는 교회생활 가운데서 갖추어야 할 윤리적 덕성을 함축합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윤리적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복에 관한 비유는 모든 경계를 허문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는 어울리지 않지만, 교회의 시대에는 어울린다고 보았기에, 이 이야기에 포함된 것입니다.

알레고리화되어 있는 본문말씀의 의미를 일일이 숙고하기보다는 본래 이 비유의 초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마태복음 본문 비유의 골자는 초대 받았으나 초대에 응하지 못한 사람과 처음에 초대받지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비되는 데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저는 도마복음의 비유가 훨씬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마태복음의 비유를 전제로 하고 그 의미를 이 시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을까요? 오늘의 역사적 지평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먼저 초대받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먼저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애초 초대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잔치를 누리게 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레온하르트 라가츠는 말했습니다. “만일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거부한다면 하나님과 그의 나라는 비신앙인들에게로 간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와 예수의 메시지에서 선포된 하나님 나라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푸르동과 바쿠닌, 마르크스와 레닌에게로 간다. 만일 신앙인들이 진리를 멸시한다면 비신앙인들이 진리와 함께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특히 기독교와 그와 연관된 전 세계의 몰락을 뜻한다.”
지금도 타당한 우리 현실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교회는 신뢰를 잃고 있는데, 신앙과 상관없이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높은 신뢰를 얻고 있지 않나요?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 이름만으로 특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말씀 말미에 덧붙여진 예복에 관한 이야기는 그 나름의 교회 상황에서 비롯된 고심의 결과로 봅니다.
우리들 모두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증언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길을 어렵지 않게 일깨워 주십니다.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 삶을 우리 일상의 삶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애쓰는 삶입니다.
타인을 정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이른바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바를 우리의 삶 속에 구현하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 나라의 삶, 잔치의 기쁨을 구현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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