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 누가복음 15:1~7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7-02 17:48
조회
8299
2017년 7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본문: 누가복음 15:1~7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요체를 알려주는 말씀이자 동시에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핵심 요체를 보여주는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매우 간결한 비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지만, 그래도 본문말씀의 뜻을 새기기 위해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첫 장면은 예수님을 둘러싼 두 부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듭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들을 반가이 맞이하는 것을 보고 수군거립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수군거렸다는 것은 그 상황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유대의 율법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사태였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양 백 마리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양을 찾으면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기쁨을 나누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저 마음으로 기뻐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열며 기쁨을 나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잃었던 양을 되찾은 기쁨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의 말씀 끝에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사실 더 간결한 형태로 동일한 비유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18:12~14)은,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훨씬 비유의 본뜻을 분명하게 집약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명쾌한 비유의 말씀인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비유 자체도 간결하고, 그에 덧붙여진 해석 또한 간결하여 큰 어려움 없이 그 뜻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째서 목자가 양 아흔아홉 마리를 그냥 두고 단 한 마리를 찾아나서야 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말씀을 두고 구구하게 말을 덧붙이며 말씀의 뜻을 흐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목자가 너무 무모하고 어리석지 않으냐 하는 견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한 마리 양이 특별했기에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100마리를 꽉 채워야 되는데, 한 마리가 빠져서 그 한 마리를 온전히 채우기 위해서는 꼭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볍게 몇 가지 예를 든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말씀이 그와 같은 공리주의적 원칙을 일깨워주는 말씀이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그 한 마리 양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잃어버린 그 양을 찾는 일이 급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인에게는 본인 자신으로서보다는 그 제자로 인해 더 잘 알려진 선사가 있습니다. 한국의 불교를 세계 널리 전파한 숭산 스님입니다. 그 제자가 <만행,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 현각 스님입니다. 숭산은 23살의 나이에 견성하여 화계사 주지를 거쳐,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서구의 젊은이들을 구제하겠다’는 뜻으로 46살에 미국에 건너가 포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처음 영어 한마디 못하는 처지에서 뉴욕 할렘가에 방을 얻어놓고 포교활동을 시작했는데, 오늘날 세계 30여 개국에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130여개의 선원이 생겼습니다.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할 때 어느 날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미국에 와서 포교하십니까?” 이 물음에 숭산이 답합니다. “바로 너 때문이다.”
한 사람의 영혼이 지니는 무게, 한 영혼의 소중함을 그 한마디로 답했는데,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명쾌한 비유의 초점을 흐려 그 본뜻을 곡해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 간결한 말씀의 의미를 아예 외면하는 교회의 사태입니다. 이미 앞서 확인했지만, 오늘 본문말씀은 핵심이 무엇입니까?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오늘 본문말씀의 핵심 요체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의 핵심요체입니다.
그 입장에서 죄인들과 세리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수군대고 비아냥거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대 이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과는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며 오늘 비유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통탄스러운 일은 다수의 교회와 기독교인이 그 행동의 표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8차례에 걸친 인문교양강좌를 지난 수요일 마쳤는데, 그 과정에서 이미 함께 나눴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2007년, 2010년, 2012년 총 3차례에 걸쳐 차별금지법의 입법이 시도되었지만,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 법안이 차별해서는 안 되는 조건으로 제시한 “성별, 장애, 병력(病歷), 나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및 보호처분, 성적(性的) 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가운데서, ‘성적 지향’에 관한 항목이 동성애를 부추길 것이라는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이 그 법의 제정을 막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지금 진행중입니다만, 또 하나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있는데, 2017년 6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이단대책위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섬돌향린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단사상 조사연구에 대한 자료요청의 건’이라는 ‘무도한’ 공문을 발송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로서는 드물게 우리 사회의 성적 소수자를 감싸 안고 그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 교단 총회가 자신들과 다른 교단의 총회 소속 교회를 두고 이단 왈가왈부하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도 있지만,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 옹호를 위한 활동이 이단 정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할까요?
이미 저 지난 주 강의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하였기에 이 시간 길게 반복할 수 없지만 그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과학적 의학적 견해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는 정신과 진단의 표준을 제시하는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서 동성애를 정신과 진단명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동성애가 그 자체로 판단력, 안정성, 신뢰성, 또는 직업 능력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미국정신의학회는 고용, 주택, 공공장소, 자격증 등에서 동성애자에 대해 행해지는 모든 공적 및 사적 차별에 개탄하며, 그러한 판단력, 능력, 신뢰성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동성애자에게 더 많이 지워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와 같은 의학적 결정에도 불구하고 동성애가 질병이라는 주장이 계속되자 2016년 3월 세계정신의학회는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입장을 재삼 밝혔습니다.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영속시킨 불행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대 의학이 동성을 대상으로 한 성적 지향과 행동을 병리화하는 것을 그만둔 지는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 세계보건기구는 동성을 대상으로 한 성적 지향을 인간 섹슈얼리티의 정상적인 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의 인권을 존중한다. 두 주요 진단 및 분류 체계에서는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 끌림, 행동, 그리고 성별 정체성이 병리 현상이라고 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의 불편함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성적 지향이 과학적ㆍ의학적으로 병리현상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 상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서가 이를 금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정죄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저번 강의에서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성서본문들을 일일이 검토하였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그 결론만 말씀드립니다. 그 결론은 성서가 확고하게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언자나 예수님에게서는 동성애를 정죄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동성애를 문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레위기, 로마서, 고린도전서).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과학적ㆍ의학적 상식이 없는 상태에서의 일종의 편견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그나마 언급된 그 문맥들을 볼 때 특정한 성적 지향을 정죄하려는 목적을 지닌 경우는 없습니다. 결국 전반적인 문맥과 당대의 상황을 고려해 해석해야 하고(다른 규정은 배제하면서 유독 그것만 문제시하는 것은 성서해석의 오류), 또한 오늘의 보편적인 윤리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동성애자로서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다면 어찌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낯선 것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정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성서를 근거로 하여 정죄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고하게 동성애에 대해 정죄하는 교회와 기독교인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은밀한 욕망의 발로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는 또 다른 정치적 목적 때문에 그 문제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른바 성소수자 축제가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것은 2000년부터였는데, 반대시위가 열린 것은 2014년부터였습니다. 이 반대 시위에 참여한 한 목사는 이렇게 실토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동성애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박원순 때문이지.”(<한겨레신문> 2017.6.29. 29면 참조) 이 문제로 다른 모든 정책을 매몰시켜버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통령 후보 토론 과정에서의 해프닝도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 문제로 자신들이 안고 있는 더 심각한 성적 문제를 덮어버리는 효과를 노리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예 가운데서 성적 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교회와 목회자를 이단시하는 그 교단 안에는 성적 스캔들로 물의를 일으킨 경우가 알려진 것만으로도 많지만, 제대로 치리한 경우는 없습니다. 아직도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그 교단에서는 내년부터 신학교에 여학생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소문도 들립니다.
하나의 예입니다만, 잃어버린 양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나서는 태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오히려 반기는 태도를 환기시켜주는 사례입니다. 특정한 하나의 대상에만 관련된 태도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정죄하는 태도는 끊임없는 연쇄 고리를 형성해 칭칭 감기고 얽힌 그물망을 만듭니다. 그로 인해 허다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말씀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를 문제시한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 작은 사람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오늘 우리는 일년의 절반을 마감하고 새로운 절반을 맞이하는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어떤 열매를 거둬들였습니까? 앞으로 맞이하는 시간 가운데서 또한 어떤 열매를 거두기를 원합니까?
오늘 말씀이 튼실한 열매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푯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품 안에서 모두가 자유함을 얻고 구원의 희망을 바라는 놀라운 역사가 이뤄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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