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 에베소서 6:4[황의명 목사]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7-09-12 22:34
조회
8342
2017년 9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본문: 에베소서 6:4
황의명 목사(충남청소년쉼터 보호상담사)

저는 첫 전임사역지에서 중고등부를 맡아서 사역하였습니다. 모든 사역이 중요하고 그 의미가 있지만 첫 전임사역지에서 경험은 청소년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담임목회를 시골교회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청소년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서 끊임없이 청소년 사역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고, 결국 청소년 사역을 위해 쉼터로 오게 되었습니다.
쉼터는 위기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는 곳입니다. 남/녀 청소년들의 쉼터로, 단기/중장기 쉼터로 나뉘어집니다. 저는 남자 중장기 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쉼터에서 일하는 1년 동안 판사님 앞에 1번, 검사님 앞에 2번 서게 되었습니다. 경찰 조사도 2번 받아보았습니다. 거의 매달 보호관찰소에 갑니다.

몇 주전 있었던 폭력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를 때린 쉼터 아이 한명이 도망가고, 같이 있던 다른 쉼터 아이가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어서 경찰서에 갔습니다. 피해아이 사진을 보여주는데 눈에 핏줄이 터지고 얼굴이 퉁퉁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갔던 쉼터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덜하네요, 뼈하나는 부러졌을 줄 알았는데..”
이런 아이들을 보고, 요즘의 끔찍한 청소년 사건 뉴스를 보면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부모들이, 어른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에 노엽게 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엡 6:4)

“아버지 된 이”에서 아버지라는 단어의 원어는 “파데레스”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단순히 아버지가 아니라 “부모”를 뜻한다고 합니다. 서양의 독특한 언어표현 양식이 있는데 즉, “Men"→사람, ”Boy"→소년소녀 이런식으로 아버지라고 했지만 부모의 대명사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앞에 나오는 “자녀들아”와 평행을 이루기 때문에 “부모”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어버이들”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

반면 일부 신학자들은 말 그대로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헬라시대에는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자녀에 대한 모든 권한이 아버지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는 아내가 아기를 낳아서 남편에게 보일 때 남편이 아기를 안아서 들면 키우지만 기형 등의 이유로 아기를 들지 않으면 죽여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서에서는 “아버지된 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그래서 “아버지 된 이”로 번역했을 때 이 말씀은 더 혁명적이 됩니다.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에게 자신의 힘아래 있는 연약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엽게 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원어인 “메 파로르기제테”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즉, 반복적인 행위(일상적 행위)를 규정하는 명령형입니다. 어느 특정한 경우가 아닌 항상 따라야 하는 명령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력한 권력을 가진 존재에게 가장 미약한 존재 같은 그 자녀를 항상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권력을 절대 휘두르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엽게 한다는 건 뭘까요? 내가 잘못해서 벌을 받거나 어떠한 제지를 당할 때 우리는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힘들거나 슬퍼합니다. 그럼 언제 노여울까요? 억울할 때.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 내 잘못 이상으로 처벌받을 때 상대방이 날 이해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노여워합니다.
쉼터의 아이들과 지내면서 느끼는 것은 그들 속에 “화가 많다”, “분노가 많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들은 부모로부터 어른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노여움은 아이들의 마음에 남아 그들을 분노하게 하고 화가 가득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하지 못합니다. 실수합니다. 결국 알게 모르게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자녀를 노엽게 했을 때 우리는 비록 부모이지만 우리의 권위, 권력, 힘을 모두 내려놓고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의 마음속에 노여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대안을 제시합니다.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훈련과 훈계는 뭘까요? 히브리 목자들과 서부시대 목자들은 양을 치는 방식이 다릅니다. 서부시대 목자들은 양들의 뒤에서 총과 사냥개, 채찍으로 위협하면서 양을 몰아갑니다. 그러나 히브리 목자들은 양의 앞에 서서 나아가면서 양을 따라오게 합니다. 양들은 앞서 걸어가는 목자의 걸음을 따라 그곳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어 본이 되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훈련과 훈계는 먼저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책을 읽히려면 먼저 부모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자녀를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먼저 부모가 스마트 폰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럼 지금의 이 폭력적인 청소년들의 사건을 어떻게 근절할 수 있을까요? 강력하게 처벌하면 해결될까요? 아니오.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아이들은 내일 일어날 뒷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 현재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내일 당할 처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해결책은 어른들이 먼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로 사람을 제압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인권이 존중되는 삶을 살고 그런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갑질이 사라지고 사람을 서열화 계급화 하지 않고 서로 섬겨주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남과 북이, 국가 대 국가가 무기와 군사력을 통한 전쟁이 아닌 대화와 평화로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절대로 폭력으로 힘으로 서로를 억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닮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청중 앞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제자들이 와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지금 주님을 만나러 와서 주님을 기다리십니다.”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러면서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기 위해 때로는 아픔을 치유받기 위해, 때로는 삶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애타게 말씀을 듣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선포하십니다. “너희도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자매다.” 예수님은 단순히 혈연으로서의 가족을 뛰어넘어 범인류적인 가족애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단순한 혈연의 가족을 뛰어넘어 거리를 걸어가는 아이들이 내 자녀로 볼 수 있다면... 더불어 길가에 수레를 끌고 다니시는 어르신들을 내 부모로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사회는 점점 하나님의 나라를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준다면 우리의 자녀들도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그런 모습이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전수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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