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 나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 - 누가복음 11:14~2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11-12 18:58
조회
8035
2017년 11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 나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
본문: 누가복음 11:14~23

오늘도 간단치 않은 말씀본문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표징에 관한 이야기로, 매우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말 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놀랍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행하신 치유와 기적에 관한 이야기로, 적어도 그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기적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은 거기에 방점이 있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더 비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공통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은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말씀은 그 사실 외에 반응을 보인 두 부류의 태도에 관해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고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내쫓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알세불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당시 유대인들에게 악한 신의 두목, 곧 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렇게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누가복음의 병행구는 이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본문 역시 서두에서 이들을 딱 꼬집어 말하지 않지만, 뒤에 보면(37) 역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사탄에게서 비롯된 능력이라고 간주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안에 갇혀 있고, 자기 의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이 선한 하나님에게서 비롯될 턱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에 충실한, 기존의 질서를 지키는 법에 충실한 자신들은 선하지만, 끊임없이 그 질서에 도전하는 예수는 선할 리가 없다는 의식의 발로입니다. 낯선 세계, 낯선 타인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의식입니다.
다른 한편 또 다른 부류는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합니다. 이들 역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가운데 속해 있는 한 부류로 추정되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표적,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더 확실한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악령추방, 귀신추방만으로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확증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이 요구는, 여러 형태의 악령추방 행위가 당대에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더 놀라운 기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험해보고자 하는 태도였다고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절실한 요구에 따른 기적이 아니라 그저 능력에 대한 과시로서 기적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한 그들의 태도 역시 자신들이 믿고 있는 세계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서 더 놀라운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을 밑바탕에 깔고 제기한 요구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반응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응수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첫 번째 부류의 반응에 응수하는 내용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반응에 응수하는 것은 29절 이하에 나옵니다.
오늘 주어진 말씀에 집중하여야겠기에, 먼저 29절 이하의 말씀을 간략히 환기해볼까요? 유명한 말씀입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예수께서 이르기를, 요나의 표적 외에 다른 표적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뭘 의미할까요? 요나의 표적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는 사람으로 변화된 사건을 뜻합니다. 전혀 낯선 세계, 낯선 사람들을 용인한 사건의 주인공이 요나입니다.
따라서 더 놀라운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하리라고 선포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스스로 변화하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그분의 뜻을 체감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그 완고한 마음부터 바뀌지 않고서는 어떤 기적도 누릴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행하신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뭘 더 깨달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일으킨 사건의 실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말씀은 분명하게 해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반응을 보인 사람들에 대한 답변이 그 해명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꿰뚫어보시고 답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 그러니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당신이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격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한마디 덧붙입니다. “그러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느냐?”고 하십니다. ‘너희의 아들들’은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람들 가운데 귀신축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도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또한 그들이 보기에 지금 예수님에게 반문하는 사람들 보고 뭐라 하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그렇게 반문하신 예수께서는 비로소 당신께서 일으킨 기적 사건의 의미를 해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그 진실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지금 일으킨 기적의 사건, 곧 말 못하는 사람에게서 악령을 내쫓고 말문을 열어준 사건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행한 것이며, 바로 그 사건은 지금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적인 이야기를 덧붙여 그 사건의 의미를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힘센 사람이 자기 집을 지키며 자신의 소유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지만, 그보다 더 힘센 사람들이 달려들면 더 힘센 사람에게 노략을 당할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센 사람에게 노략당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질 것이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바알제불의 힘보다 하나님의 힘이 더 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엄중하게 이르고 있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오,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렇게 마무리됩니다. 이 말씀을 대하는 순간 어느 대목에서 그와 상반된 말씀을 하신 것을 떠올릴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가 9:40) 지난 주일에 성서해석에 관해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예수께서는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생생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말씀은 굳이 적의를 표하지 않은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을 이야기한 것이며, 오늘 본문말씀의 결론은 지금 표징을 보고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게다가 악의적으로 지금 벌어진 사건을 곡해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진실을 깨우칠 것을 촉구하고 과연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적폐청산을 시도하는 것을 보고  과거에 발목 잡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를 제대로 청산해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마지막 말씀은 그 결단을 촉구한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본문말씀을 일일이 그 문맥을 좇아가며 뜻을 헤아렸습니다. 다시 한 번 집약하여 말씀의 의미를 새기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벙어리 귀신을 내쫓고 벙어리의 말문을 열어준 것은, 사탄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보다 힘이 세다. 지금 사건을 보며 그 진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 있다. 과연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본문말씀은 이렇게 간결하게 집약됩니다.
문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난 수요 인문교양강좌 종강 시간에 참여한 분들은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졌습니다만, 하나님 나라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수없이 말씀하셨지만,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비유로 말씀하셨고, 또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라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딱 부러지게 정의를 하신 바 없습니다. 굳이 정의한다면, 오늘 본문말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사탄이 지배하는 현실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 구체적 내용이 정의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무한한 가능성 가운데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역시 오늘 본문말씀에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 못하는 벙어리의 입을 열어주신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례일 뿐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비유 또한 하나하나 그대로 볼 것 같으면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들일 뿐입니다. 행하신 것도, 말씀하신 것도 다 그런 셈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전모를 그려볼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이 지배한다는 의미를 생각해볼까요? 이것은 철저하게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스스로의 공로를 생각하는 순간 우월감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의 욕망으로 전화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렇게 싫어하신 이유가 뭘까요? 바로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거기에 사탄의 나라가 자리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벙어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 존재를 스스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문을 열어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몇 가지 특징적인 사례들을 더 들어볼까요? 포도원에 아침에 나가 일하는 사람과 저녁 때 나가 일한 사람이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 까닭,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한 아들보다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이 사랑받는 까닭, 악인이나 의인이나 차별을 두지 않고 똑같이 비를 내리고 햇빛을 비추는 까닭...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공로의 법칙을 따르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때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현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입니다. 어떤 공로도 내세울 수 없기에 다가오는 손길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리, 바로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사랑의 손길을 온전히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는 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탄의 힘보다 하나님의 힘이 세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공로와 업적 위에 올라타 끊임없이 사람들을 그 노예로 만들고 힘없는 사람들을 벙어리로 만드는 그 힘보다,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고 도대체 자기를 표현할 길 없기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다가오는 사랑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이도록 하는 그 힘이,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시적ㆍ물질적 능력으로, 합리적 지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힘으로 이를 수 있는 궁극적 실체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따르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을 자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리에 함께 해야 할까요? 말씀의 진실을 깊이 새기며, 그 뜻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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