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치명적인 유혹 - 민수기 21:4~9 [2018 기독교환경회의 개회예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2-06 15:19
조회
13142
2018년 12월 6(목) 오전 10:00 2018년 기독교환경회의 개회예배
제목: 치명적인 유혹
본문: 민수기 21:4~9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자유가 억압당할 때 자유를 얻기 위해 갈망하지만, 거꾸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노예의 삶은 자유가 없이 주인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만입니다. 반면에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삶에는 의지와 결단,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이 중요합니다.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것은, 그 책임의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말합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을 향한 자유’로 나아갈 때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보장된다고 보았습니다.

성서의 출애굽기와 이어지는 책들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망, 그러나 그 자유를 향한 여정의 고단함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군대를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하여 광야에 이르자마자 히브리 백성들은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히브리 백성은 그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다.”(출애굽기 16:3)
소위 이집트의 고기 가마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고기 가마가 있기는 하였을까요? 어쨌든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 고단함으로 인한 퇴행적인 환상입니다.

민수기의 본문말씀은 출애굽의 여정에서 반복되는 불평의 상황을 전합니다. 천신만고의 여정을 지나 이제 머잖아 가나안 복지에 이르게 되었을 즈음, 히브리 백성은 에돔 땅을 우회하여 광야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고 전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 것도 없다. 마실 것도 없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이 상황은 출애굽기가 전하는 불평의 상황과 조금 다릅니다. 출애굽기가 전하는 바는 아예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그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민수기가 전하는 상황은, 먹고 마실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건 똑 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간 일용할 양식이 되었던 만나와 메추라기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일용할 양식이 아예 없던 상황과 넘쳐나지는 않지만 일용할 양식이 있는 상황의 차이는 큽니다. 절대 빈곤의 상황에서 경제개발을 해야 하는 상황과 웬만큼 먹고 살만해진 상황에서 계속 경제성장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다릅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처방을 내립니다. 아예 먹고 마실 것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이 충족된 상황에서 터져 나온 불평에 대해서는 다른 처방을 내리십니다.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불뱀을 보내어 사람들을 물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부터 본문말씀은 조금 난해해집니다. 고대 종교의 상징이 등장하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오늘 우리들의 관념으로는 해석상의 곤란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불가불 본문의 진의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불뱀 또는 뱀의 상징적 의미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환기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린 진노로 많은 백성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와서 간청합니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사는 길을 일러주십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뱀에 물렸을 때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념으로 볼 때 그저 주술적 행위에 지나지 않은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뱀’또는 ‘불뱀’은 모순된 이중적인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불뱀’은 날개달린 뱀을 뜻하는 것으로 그냥 ‘뱀’과는 구별되기에 약간 혼선은 있지만, 그 혼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뱀은 우선 치명적인 유혹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삶을 삶답게 누리지 못하고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만드는 치명적인 유혹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직접적으로는 사막에서 독사를 경험한 데서 이러한 연상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치명적인 유혹의 상징으로서 뱀은 창세기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뱀은 다시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구리로 만든 뱀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그 뱀은 생명의 상징이 됩니다. 보다 일반적인 뱀의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뱀은 겨울잠에서 다시 깨어나는 재생(再生), 허물을 벗는 환생,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불사(不死)의 동물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알과 새끼를 낳아 다산성(多産性)의 풍요와 가복(家福)의 신으로서 생명 탄생과 치유의 힘을 나타내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군의관의 상징은, 뱀이 생명의 창조와 치유의 힘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뱀을 바라봄으로써 죽음에 이르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고대 종교적 상징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왜 이렇게 헷갈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고대 상징의 세계에 익숙하지만,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성서기록자의 시선에서는 뱀의 상징을 나름대로 성서적 맥락에서 ‘토착화’시키고 있는 까닭에 다소 혼란스러워 보일 뿐입니다. 아마도 고대 사람들은 생명의 상징인 뱀을 바라보는 주술적 행위 자체가 효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믿었겠지만, 성서의 기자는 그 관습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본문말씀의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뱀을 바라보는 행위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유혹의 위험성을 환기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던 백성들이 치명적인 유혹의 위험성을 환기했을 때,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본문말씀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뱀을 바라보는 것은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를 바라보고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마치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가 무슨 영광스러운 것인가요? 그것이 무슨 능력을 지니는가요? 그것은 세상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세상의 수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특별히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에 길에 이를 수 있지만 십자가 자체가 어떤 능력을 발휘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한갓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은 자유의 기나긴 여정에서 겪을 수 있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유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는 물질의 유혹, 과욕에 빠질 때 사람은 자유를 잃고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여기고 대책을 모색하는 것은, 오늘의 인간문명이 빠지고 만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를 제대로 응시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요? 일상이 되어버린 미세먼지를 줄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변동에 대처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이전에, 그 현상을 야기한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인간의 경제적 풍요와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무한정 기술을 개발하고 자연을 착취한 결과가 오히려 거꾸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게 된 것 아닙니까? 살겠다고 하는 짓이 죽음으로 인도하는 현실!
성서의 말씀은, 그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부터 제대로 응시함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나도록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나누고 함께 결단하는 이 자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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