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냐, 바라바냐? - 요한복음 18:33~40[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4-07 15:01
조회
37958
2019년 4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냐, 바라바냐?
본문: 요한복음 18:33~40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고 처형에 이르는 과정을 전하고 있는 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일련의 재판과정은 더 길게 이어지지만, 그 가운데 핵심적인 신문과정과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말씀은, 어째서 예수께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 그리고 예수의 삶과 생각을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길이 어떤 것인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배적 가치와는 명백히 다른 그리스도인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수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다수의 삶을 파괴하는 세상의 법칙에 반하여 세상 만민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삶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이라는 것을 재삼 일깨워 줍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자 빌라도는 예수의 죄목을 캐기 위해 신문합니다. 빌라도는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라고 묻습니다. 이 신문에 대해 예수는 대답에 앞서 빌라도의 질문의 의도를 묻습니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해 준 것이오?” 다른 전제가 없이 그대가 던지는 질문이라면 그 나름대로 내가 대답을 하겠지만, 다른 전제를 하고 있다면 먼저 해명을 해야 할 것이 있다는 태도입니다. 이 반문에 빌라도는, ‘당신네 동족과 사제들이 말하기를 당신이 왕이라고 자처해서 재판해달라고 당신을 나에게 넘겨줬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이오?’라는 취지로 답합니다. 그 의중을 파악하고 예수는 대답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고 대답합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정해 놓은 물음의 틀 안에서 ‘예’ ‘아니오’라고 대답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빌라도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왕이라고 하는 것도 같고 아니라고 하는 것도 같은 대답을 내놓습니다. 그러자 짜증이 난다는 태도로 다그쳐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그러자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 ‘진리’를 설파하는 답변은 없습니다. 대신에 그 진리를 따르는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물음을 던진 빌라도 역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속국 유대에서 벌어진 한 송사에서 사형집행 권한이 있는 로마제국의 총독으로서 역할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악의 평범성’을 연상시키는 ‘영혼 없는’ 법 집행자의 모습입니다.
빌라도는 세상의 법 집행자로서 예수에 대한 고발 당사자들인 유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 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 이 제안은, 예수의 무죄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는 고발자들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골치 아픈 송사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예수인지 바라바인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그 중 누구 하나라도 처형하면 제국의 위용을 위한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제안은 고발 당사자인 유대 사람들에게 마뜩찮은 것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고발 당사자들로서 아주 명시적으로 자신들이 예수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사면 대상자로 선택합니다. 바라바는 로마에 대항해 정치적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선택은 빌라도에게 마뜩찮았을 것입니다. 로마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자를 처벌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력과 체제유지의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교활한 총독 빌라도는,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는 유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결국 예수를 사형 판결 처분합니다.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세상질서를 지탱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추구하거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령 다른 동기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 동기에 따른 행동의 결과가 체제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면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이들에게는 훨씬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를 죽이는 데 어차피 로마 총독 빌라도와 유대 사람들은 공모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정치적 야심이 신앙으로 포장되고, 신앙의 타락이 정치적 선동이 되어 서로 야합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초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서 첫 번째 핵심으로서 먼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고 한 말씀을 주목합니다. 이 말씀은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해서 해석상 논란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이 말씀은 우선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논란거리는 아닙니다. 이 말씀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세상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일과는 무관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세상일과 인연을 끊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정치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일 혹은 경제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진의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현실의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와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이 말씀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와 방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세상의 법칙은 누군가와 싸워 이겨야만 생존하는 원리를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가 그와 다르다고 한 것은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암시합니다.
이 말씀의 참뜻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당신이 왕이오?”하는 빌라도의 물음 앞에서 예수께서는 굳이 부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앞의 말씀과 관련해 생각하면, 유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왕은 아니지만 이 세상의 왕인 것은 틀림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말씀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천상에서 고고하게 세상을 조종하는 분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온’ 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영적 세계의 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이 세상의 주요, 역사의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답에서 우리의 존재 근거와 행위의 방법이 결정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있으나 하늘의 진리를 추구하며, 하늘을 본향으로 삼고 있으나 땅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된 성격을 지니며 동시에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닙니다. 신앙과 윤리가 결합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의 진리를 따르는 신앙과 함께 그 하늘의 진리를 구체화할 땅의 윤리를 필요로 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 두 번째 초점을 주목합니다. 왜 유대 사람들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선택하였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는 데서 그 어떤 정치적, 종교적, 신학적 추론을 따르기보다 인간 내면의 욕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고 있는 흥미로운 한 입장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갖는 의의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 신학자들의 그 탐구와는 전혀 다른 상상력으로 예수에 접근한 사상가가 있습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으로 더 유명한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로, 그는 『그리스도의 살해』라는 책에서 매우 흥미로운 통찰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마치 목숨이라도 건 듯이 매달리는 논제들에 매이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상상과 통찰이 빛나는 저작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의 ‘살해’라는 제목은 거꾸로 ‘삶’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라이히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 대신에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갈릴리에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환기합니다.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것은 과거의 한 인물을 복원해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되살려 놓고자 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살해’는 이천년 전의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진정한 삶의 거부 곧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죽임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살해’가 함축하는 의의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대표합니다. 그의 삶은 육체를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자연적인 위엄과 매력적인 신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기에 삶을 파괴하는 원수들을 미워합니다. 미움이 필요한 경우에 미워할 수 없다면 사랑이 필요한 경우에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렇게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따라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그의 육체적 삶을 신비화하고 정신화할 때 그는 살해당합니다.
맘껏 사랑을 발산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삶을 신비화고 정신화하여 결국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살아 있는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정한 처소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머물러 있는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무장을 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삶을 억압합니다. 그리스도의 살해는 바로 그 삶의 억압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삶은 현실로 경험되기보다는 신비화되고 정신화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진정한 삶에 대한 포기로서 좌절을 뜻합니다. 라이히는 사람들 사이에 구조화되어 있는 그 좌절을 ‘정서적 전염병’이라 이릅니다. 그 정서적 전염병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살해합니다. 그리스도가 살해당한 바로 그 자리에 외부적인 권력이 개입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고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한 힘에 의탁하고자 할 때 외부적 권력이 사람들 스스로의 능력을 대신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말씀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성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에 이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리스도보다는 정치적 투사인 바라바를 원했다는 것을 전해 줍니다. 온전히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보여 준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무력할 뿐인 존재로 비춰졌고 정치적 투쟁을 한 바라바야말로 자신들이 하고자 한 일을 대신해 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천년 전의 사건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20세기에도 반복되는 현상이라는 점을 라이히는 지적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력해지고 공허함을 느끼는 그 자리에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들이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해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오늘도 되풀이 되고 있는 현상이라 통찰하고 있습니다.
라이히는 인간의 정서 안에 자리 잡은 질병을 그렇게 진단하고 있지만 그 질병을 극복 불가능한 난치병으로 치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성서가 증언하는 부활이 살아 있는 삶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며, 그 믿음이 있는 한 삶 자체의 살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 희망을 피력하는 맥락에서 라이히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의 살해』는 대중심리에 대한 탐색 및 권력비판에서 나아가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미래교육의 전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라이히가 그려내는 그리스도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와 정치권력에는 위험하고 불온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전하고 있는 “진리를 증언”하고 “진리에 속하는” 삶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주일, 저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이, 중단될 수 없는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과 통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묻는 물음입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맘껏 누리는 진리의 삶은 그 삶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세상의 질서를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삶을 파괴하는 세상의 제도와 법에 대해 세상의 지배자들이 순종을 요구할 때 우리는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는 삶이 무엇인지 그 길을 찾는 데 충실해야 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그러나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왔소.” 이 말씀의 뜻을 따라 진정한 삶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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